이착륙
2022. 8. 22.

 

1

 

  '진행요원이 보이면 멈춰 서야 해요.' 그래서 이네스 다비드는 멈췄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떠난 뒤라 해변은 적막했다. "미션이다! 저쪽-에서 먹을 수 있는 동물을 잡아와!" 이네스는 가만히 자리에 서서 요원을 노려본다. 총이며, 나무 막대기 따위를 들고 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로지아 공적 일당의 품에는 폭탄이 가득 들어 있었다. 혹시 나만 바보처럼 여기 멈춰 선 건 아닐까? 아아.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 또 비웃을 테지. 아니, 그런 건 상관없다. …상관없나? 어제 그 영국인 비행사가 멧돼지를 잡으러 갈 때 따라 나설 걸 그랬다. 아니다. 그러면 지금 이곳에 서 있지도 못했을 터다. 멧돼지 피 대신 내 피를 봤겠지…….

  의심과 후회가 익숙하게 달라붙는다. 그 끝엔 '포기'라는 달콤한 선택지가 있는데, 이네스는 차마 그리로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배와 등에 딱 달라붙은 온기와 약속과 시선이 선명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이네스는 진행요원 앞으로 돌아온다.

  "됐죠?"

  피 묻은 손에는 요원이 바라던 것이 들려 있었는데, 이네스에게는 그 동물의 이름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2

 

  무인도에 온 뒤 이네스 다비드는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다른 이들과 부대끼는 게 껄끄러웠다. 야간의 격납고에서 혼자가 되었을 때보다 외로웠다. 해변을 지나 숲으로 접어들자, 외딴 섬처럼 홀로 선 요원이 팔을 흔든다. 이 숲에서 이네스는 종종 시간을 보냈다. 나무며 돌에게 말을 거는 사람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이네스는 그들에게 말을 걸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그마저도 저를 환영하지 않는 곤충이며 동물 소리에 놀라 도망치기 일쑤였지만…….

  이네스는 순순히 오렌지 나무에서 오렌지를 딴다. 채 닦지 못한 피가 손에 말라붙었다. 농부의 마음을 안 적은 없어도 깨끗한 손으로 과일을 만져야 한다는 건 아는데,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문득 밀레타의 굳은살 촘촘히 박힌 손이 떠오른다. 이오바테스의 거친 발도. 로스트 파라다이스에서 이네스는 이오바테스를 잡아 이끌었지만, 이곳에서는 이오바테스가 주는 것을 고맙게 받는 것밖에 못한다. 사람 일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밤에는 레몬 우린 물을 마시고 잤다. 오늘은 오렌지도 괜찮겠다. 이네스는 오렌지 몇 알을 요원의 앞에 던지듯이 놓아두고 걸음을 옮긴다. 한참 늦었으니 따라잡으려면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

 

 

 

3

 

  "정말?? 정말로?"

  이네스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차오르는 숨 진정시킬 새도 없는데, 꽃을 따 달라고? 이네스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본다. 혹시 여기가 거긴 아닌가? 신발 한 켤레 남기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딱이라던…. 어느 밤 니나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찰리가 덤불에서 찾아낸 신 한 짝도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얼마나 부리나케 도망갔을까! 찰리의 목소리. 깔깔 웃는 자신의 목소리. 아아, 이건 악몽이야…….

  "저기요! …방법은 상관 없으니까 정신 차리세요."

  요원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이네스를 악몽에서 건진다.

  "방법은 상관 없다고 했죠."

  "네. …그런데 그, 눈싸움 한다고 떨어지진 않을걸요."

   꽃을 빤히 노려보는 이네스에게 요원이 속삭인다.

  "미안해요. 저도 막 원해서 부탁 드리는 건 아닌데."

  "아뇨, 됐어요."

  까칠하게 날이 선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괜찮아요." 이네스는 느리게 말을 보태고, 절벽에 손을 올린다. 팔이 벌써 떨리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네스 다비드는 절벽 위의 꽃을 딸 묘안을 알지 못한다.

  "괜찮으세요???"

  그리고 절벽을 오르는 법도 모른다. 이네스는 절벽을 오르다 미끄러졌다. 쓸린 팔에서 피가 난다. 요원이 황급히 다가와 이네스를 부축한다. 아, 울고 싶다.

  "이거!!"

  이네스는 요원의 품에 너덜너덜한 꽃을 안겼다.

 

 

 

4

 

  메릴 위베르와 산드라 로드리게즈는 알고 있을 사실 하나. 이네스 다비드는 승부욕이 강한 편이다. 게임은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요? 난 이기려고 하는데.

  손에 피가 묻고 블라우스는 찢어졌고 팔은 아려오고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날아가 버렸는데 이래놓고 끝을 못 봐? 말도 안 돼! 이네스는 뛰듯이 걷고,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조종간을 꽉 쥐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고개를 들면 다른 이들의 비행기가 보인다. 이런 우스운 레이스에 열심인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니 다행이지. 이젠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이네스는 너른 강 앞에서 만난 요원에게 손짓했다. 어서 미션인지 뭔지 내놓으라고.

  "자, 미션임다! 나를 위해 노래 한 곡 불러주세요. 노래가 힘들다면 탭댄스나, 다른 춤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이건 아니죠…."

  맥이 탁, 풀린다.

  유진 할로웨이는 알고 있을 사실 하나. 이네스 다비드는 노래를 못 부른다. 노래를 부르는 건 유진의 몫이다. 보통은… 춤도 마찬가지다. 이네스는 양손에 얼굴을 묻는다. 아. 혼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졸라서 같이 오자고 그럴걸. 아니다…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라윈이라면 괜찮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부르라니까 부르는 거예요. 웃지 말아요."

  어린 시절, 어른들 앞에 서서 뻣뻣하게 노래를 부르던 꼬맹이 이네스가 된 기분이다. 꼭 그때처럼 부끄럽다. 이네스는 얼굴을 가린 채 노래를 부른다. 아. 그래도 역시, 이 노래를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목소리가 풍랑처럼 흔들린다.

 

 

 

5

 

  그 거대한 폭풍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배고파.

  사랑하는 베아트리체, 이게 나의 끝인가 보오.

 

  이네스 다비드는 쪽지가 든 유리병을 여러 개 발견했다. 바다에 유리병을 띄우는 낭만 소설이 많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이네스는 쪽지들을 바다에 버리고 유리병을 챙겨 돌아왔다. 하나는 깨졌고, 하나에는 돌멩이를 모아 담았고, 두 개는 아직 온전하다. 유리병은 주피터 M 도자기 인형과 함께 나란히 이네스의 트렁크에 놓여 있다. 깨지지 않도록 천까지 잘 둘러 두었다.

  다섯 번째 유리병이다. 탐사하던 습관대로 바다에 시선을 돌린 이네스는 갈색 유리병을 발견했다. 단단한 병뚜껑을 간신히 열자, 지친 몸이 뒤로 넘어간다. 이럴 땐 수상기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새빨간 룬킨을 떠올리던 순간, 눈앞으로 별들이 반짝이다 사라진다.

  이네스는 이미 사라진 별의 꼬리를 잡을 것처럼 뚜껑을 재빨리 닫는다. 아. 웃음이 터졌다.

 

 

6

 

  "지금 나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건가요?"

  "자, 자. 미션이야. 얼른!"

  이네스는 헉헉거리면서 숨을 고른다. 눈 앞의 소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네스를 재촉한다. 이네스는 허리를 펴고 소년을 내려다 본다.

  "1937년. 5월. 나는 그때…"

  소파에 앉은 막심 다비드가 신문을 펼친다. 독일. 영국. 러시아. 미국. 이탈리아. 세계 정세를 따분하게 읊던 노인은 별안간 성을 내며 신문을 던진다. 또, 또 그 얘기군. 이네스는 신문을 보지 않아도 막심이 화가 난 이유를 알 수 있다. 주피터가 피레네 프로젝트를 발표한 것이다. 바보 같긴. 하늘의 섬이라니 그딴 데에 돈을 낭비하고 싶은 건가? 주피터도 노망이 났어. 하늘로 고개를 들고 있으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지. 이네스는 제 아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멈칫한다. 단 한 마디를 각인처럼 새기고 무언가를 결심한다. 이건 6월의 일.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인다.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라윈은 무얼 하고 있을까. 오늘은 비행기 한 대 날지 않는구나."

  비행기 한 대가 소년과 이네스의 위로 날아간다. 비행기를 쫓아 시선을 돌리면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시원한 바람에 상처가 아려온다.

  "그게 조금 서글펐네."

 

 

7

 

  이네스는 제 형제와 함께 춤을 배웠다. 좀처럼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이네스를 위해 앙뚜안은 입으로 박자를 세 주곤 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서로의 발을 밟지 않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춤을 췄던 첫 순간, 사교 선생님은 박수를 치면서 두 아이에게 말했다. 완벽한 한 쌍이라고. 너희는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같은 나이, 비슷한 눈높이, 한 명은 신사 역, 한 명은 숙녀 역으로. 이네스 다비드와 앙뚜안 다비드는 그 후로도 함께 춤을 췄으나, 그들의 눈높이는 달라졌다. 나이가 들면 많은 게 달라진다. 앙뚜안은 춤에 흥미를 잃었고, 이네스는 형제가 없어도 박자를 맞출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 오후, 이네스는 캐서린의 앞에서 비행기가 낙하하는 포물선을 그려 본다. 막심의 다비드는 딱 그 모양으로 추락했다. 캐서린은 이해했다. 그건 흔한 일이니까.

  이네스는 춤을 추다 미끄러진다. "괜찮으세요?" 누군지 모를 파트너는 허둥지둥 대느라 바쁘다. 아까 비탈길에서 넘어지며 접질린 발목이 자꾸 시큰거렸다. "괜찮으니까 똑바로 잡아 주세요."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이네스는 음악이 없어 아쉽다고 생각한다. 박자를 맞춰 줬다면, 넘어지지 않았을 텐데…….

 

 

 

8

 

  인간은 동굴에 갇힌 죄수와 같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쇠사슬로 묶여 있어 뒤를 돌아볼 수도 없고, 동굴의 벽만을 보고 살지요. 우리 뒤로는 횃불이 불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건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예요. 평생 그림자만 보는 삶이라니.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이해하셨습니까? 마담.

  왜 뒤를 못 돌아보는 건가요? 어떻게 묶어야 그렇게 되는 거지?

  목? 아니, 아뇨.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동굴의 밖과 안, 빛과 그림자. 이 대비를 보셔야 합니다.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나요?

  그건… 좋습니다. 플라톤은 여기서 죄수의 몸을 묶는 사슬을 풀었을 때,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슬은 누가 풀어주나요?

  아뇨!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핵심을 보세요.

  하지만 무슈…… 난 그림자밖에 보지 못하는 운명인걸요.

 

  "아하하하하!!!!! 하하!!"

  자꾸만 웃음이 튀어나온다. 아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으하하. 이네스는 동굴에 길쭉하게 늘어선 제 그림자를 보고 배꼽을 붙잡는다.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아! 멍청한 사람! 나는 그림자도 보고 뒤도 돌아보고 동굴 밖으로 걸어나갈 수도 있는데! 아하하하.

  스멀스멀스멀스멀 안개가 폐에 바람을 불어넣고 웃음을 불어넣는다. 이네스는 그대로 플라톤을 뻥 차고 부푼 풍선 같은 꼴로 동굴을 통과한다.

 

 

 

9

  어라, 이상하다. 동굴은 아까 지났는데……. 눈물을 훔치던 이네스는 자신이 아직도 동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다. 플라톤의 동굴은 아까 뻥 차버렸는데! 아, 그래.

  "플라톤이 이겼네. 아하하!"

  하하하하. 으하하. 아하하. 하하! 힉! 정신없이 웃던 이네스는 제 머리 위로 날아든 까만 형체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동굴 바닥이 미끄러워 또 넘어질 뻔했다. 뒤늦게 그 형체가 박쥐였다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면, 별이 반짝인다. 갈색 유리병에서 발견했던 것과 같은 푸른빛이다. 이네스는 벽을 짚고 손을 뻗어 별을 붙잡는다. 별은 아주 작고 거칠었다.

  뒤를 돌아본다. 좁은 동굴은 새까맣다. 안개는 자취를 감췄다.

  그래. 이곳에 이네스는 별을 잡기 위해 온 것이다. 막심 다비드를 비롯한 많은 자들이 우스워했던 천공섬의 실체를 보기 위해 이런 괴상한 레이스를 하고 있다. 비실비실 웃음이 샌다. 이네스는 갈색 유리병을 연 뒤 별의 꼬리를, 아니… 비행석 조각을 집어 넣는다. 유리에 닿은 조각이 경쾌한 소리를 낸다.

  "하하!"

  이네스는 웃었다.

 

 

 

10

 

  기나긴 동굴을 통과한 이네스는 조종석에 앉았다. 폐에 바람을 불어넣은 안개는 사라졌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팔은 저리고 머리는, 꼴이 이게 뭐람! 상공에서 이네스는 혼자고, 아무것도 수습할 수 없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아… 밤이 되면 하늘과 바다는 쌍둥이처럼 같은 꼴을 한다. '그러니 오늘 밤은 쉬고 계세요. 다녀오겠습니다.' 간밤에 제인이 그렇게 다독이고 먼저 떠났는데, 그래서 이네스는 잘 자고 일어나서 출발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이 다가온다. 이네스는 후회했다.

  강풍이 불어온다. 손에 자꾸만 땀이 났다. 장갑은? 아, 맞다. 피에 젖어서 버렸지…… 멍청이! 이네스는 주책맞게 울고 싶어졌는데, 메릴이 제 등을 안아줬던 게 기억났다. 부끄러움이 속상함과 두려움을 이긴다.

  바닷물을 앞에 두고, 이오바테스는 착륙이 이륙보다 무섭다고 말했다. 이네스는 이륙이 더 무서웠다. 익숙한 땅을 뒤로 하고 하늘로, 별로, 동굴의 끝으로 다가가는 비현실적인 감각이 소름 끼치게 두려웠다.

  오늘은 착륙이 더 두렵다. 흘긋 밑을 내려다보면 어슴푸레하게 불빛이 보였다. 사람들이 밝혀둔 불이다. 그 불은 이네스 다비드가 상공에 있음을, 혼자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고도를 낮춰야 한다는 걸 알려 준다. 이런 꼴로! 맙소사! 그러나 파일럿은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이네스는 비행기의 고도를 낮춘다. 


 

#2022

'로그 >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 잃은 영혼들은 어디로 가는가  (0) 2022.08.22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0) 2022.08.22
로마니와 이네스  (0) 2022.08.22
흔한 이름, 흔한 실수  (0) 2022.08.22
멍청하고 아름다운 사촌에게  (0) 2022.08.22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