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이름, 흔한 실수
2022. 8. 22.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 웃음소리, 넉살, 행운을 기원하는 말. 온갖 소리로 어지러운 곳에서 이네스 다비드는 혼자 서 있다. 비행사들에게 둘러싸인 이 순간도, 아니, 이 순간 더더욱… 이네스 다비드는 길을 잘못 찾아온 사람 같다. "부인. 출발 안 하십니까?" 누군가 정중하게 묻는 목소리에 이네스는 미소를 짓는다. "아직 손볼 게 남아 있어서요. 먼저 가세요." 젊은 비행사의 시선이 깨끗한 선체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아,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었는데. 곧바로 객실로 들어갈 것을. 이네스는 천천히 격납고 밖으로 나온다. 어둠 속을 가르고 비행기 한 대가 또 날아오른다. 눈을 감으면 시원한 밤하늘의 공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다시 눈을 뜨면서 이네스 다비드는 생각한다. 아아, 어쩌면 이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고….

 

 

 

 

 

 

흔한 이름, 흔한 실수

with. Jane

 

 

 

 

 

 

  "돌아오셨군요!"

  살롱 에르메스의 조명 밑에서 제인이 이네스를 돌아본다. 제인은 수다스러운 미국의 비행사다. 제인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이네스는 그의 말이 한참 이어질 것을 직감한다.

  "설마 혹시나 만에 하나 야간 비행을 가시려나 싶어 걱정했습니다. …물론 야간 비행에도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지셨겠지만요! 밤하늘이란 인간이 결코 낱낱이 알 수 없는 분야이지 않습니까. 어둠이라는 게요, 예, 조종간을 잡고 있는 손조차 희미하게 보일 때는 주변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고요. 그러니까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조금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는 거지요."

  이네스는 지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제인의 말을 들었다. 지금 내 눈치를 보는 걸까? 아, 그래. 이 사람도 오늘은 비행기에 오르지 않을 모양이구나. 이네스는 미소를 띤다.

  "어머~ 맞아요. 어둠 속이 아니더라도 비행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처음부터 어렵게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돌아오는 건 힘찬 목소리, 반짝이는 미소다. 평소보다 살롱이 조용한 탓에 이네스에게는 제인의 목소리와 라디오 소리만 들렸는데, 간드러지는 라디오 속 재즈 가수의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제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힘이 있었다. 문득 바보 같은 미소가 번질 것을 직감하고 제 입술을 손으로 가린다. 도움을 준 것은 자기면서, 꼭 자기가 구원 받은 양 해맑은 표정이라니! 참 웃기는 사람이 아닌가.

  제인. 미국에 자주 방문하는 이네스는 그 이름이 흔한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미국에서 만난 세 번째 제인은 그 이름이 '마리'와 비슷하게 많을 거라고 이네스에게 투덜거렸다. 어머. 그렇긴 해요. 당신이 내가 만난 세 번째 제인이니까. 이네스는 세 번째 제인을 놀렸다. 그리고 눈앞의 네 번째 제인은 신기한 사람이다. 이네스는 제인과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눈에 띄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 이곳에서 제인은 흐릿하게 묻혔다. 그러나 지금, 제인은 까만 눈을 반짝이며 누구보다 생기 있게 웃고 있는 사람이다. 

  "아주 점잖은 에스코트를 보여드리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엘레베이터 버튼만큼은 잘 누른답니다. 요 손가락으로요."  그새 에스코트를 제안하던 제인이 검지를 의기양양하게 들어 보인다.

  "어머나. …아하하하!!"

   수다스러운 사람은 많아도 타인의 웃음을 위해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네스는 얼마 전에 한 수다스러운 사람을 바보 취급하며 쫓아냈지만, 제인의 콧잔등에 생긴 희미한 주름이 제법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제 웃음을 되찾아 준 수다쟁이가 어찌 기껍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제인이 팔을 내밀어 신사처럼 에스코트하면 이네스는 숙녀처럼 팔을 붙잡고 그를 따라간다. "내가 일하는 공항은 지어진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서, 엘레베이터가 세련된 신식인데요. 어느날은 누가…." 제인은 누군가 손거울을 엘레베이터 벽에 비스듬히 얹어둔 덕에, 그게 인테리어의 일부처럼 사용되었던 며칠의 이야기를 조잘거린다.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친다. "어머. 어떡해. 주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쾌함을 되찾은 이네스도 제인의 이야기에 호응한다. 그러면서 이네스는 호텔 로스트 파라다이스에 도착한 첫날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떠올렸다. 호텔을 바쁘게 쏘다니며 놀다 객실로 돌아온 이네스는 자신이 놓고 온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소위 말하는 '에로 소설'이었는데, 사르데냐로 오는 길에 열심히 읽던 것을 핸드백에 넣어두고 깜빡한 것이다. 뒷골이 서늘해졌다. 이네스는 다음날 에스프레소 바에서 마누엘이 '책 잃어버리신 분'을 찾는다는 얘길 들었다. 당연히 찾아가지 않았다.

  "아주 아끼는 것이었다면 등골이 서늘했겠지요! 하지만… 설마! 주인이 장난꾸러기였다면 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식 엘레베이터에 특별한 장식을 더하는 것이지요. 그런 생각은 누가, 어떻게 했을까요?"

  제인의 진지한 얼굴에 이네스는 깔깔깔 웃었다.

  "아, 제인, 잠시만요."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눈에 들어오는 곳까지 걸어와서, 이네스는 걸음을 멈추고 마누엘을 부른다. "책을 잃어버렸는데요." 마누엘은 기묘한 표정이 되어 잃어버린 책을 돌려준다. 이네스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제인을 흘긋 바라본다.

  "마침 나도 잃어버린 것이 있어서요. 자, 이제 검지를 보여주세요."

  흔한 이름의 신사와 함께 있는 동안은 웃음도, 실수도 흔한 것이 되리라. 이네스 다비드는 소란스러운 격납고와 밤하늘을 잊고, 맑게 웃었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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