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5
2021. 12. 25.

 

 

 

  선희지는 원체 뭘 자주 잊었다. 전 애인들과 헤어진 이유 중에는 분명 선희지가 뭘 자주 잊어먹는 놈이라는 게 들어있을 터다. 선희지는 약속에 늦었고, 기념일을 깜빡했으며, 사소하지만 중요한 말들을 잊었다. 기억력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선희지는 자신에게 중요한 건 기가 막히게 기억했다. 그런 사람이 뭘 자꾸 잊는다는 건 선희지가 상대에게 불성실한 사람이라는 방증과도 같았다. 

  차가 막혔다. 이미 약속 시간에서 10분이 지나버리자 선희지는 조금 초조해졌다. '잊지 말아요.' 포스트잇에 꾹 눌러쓴 글자가 자꾸 생각났지만, 그 글씨의 주인에 관한 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기에 애틋하지는 않았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선희지는 잊어버린 시간보다 잊어버린 사람에 관해 고민했다. 애인이었을까? 친구? 동료? 아니면… 어쩌면 뭔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나가면 엿만 먹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겼을까? 아직도 기다릴까? 최소한 취향으로 생겼으면 무슨 관계였든 후회는 안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애인 만나러 가나 봐요?"

  약속 장소에 거의 다 왔을 즈음 택시기사가 물었다.

  "아… 애인인지는 모르겠는데 누구 만나러 가는 건 맞아요."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건지 모르는 건 뭐예요? 썸?"

  "아하하. 글쎄요. 그것도 가봐야 알 것 같은데…."

  "웃기는 분이네.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러 가는 사람이 보통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 여기서 내려드리면 되죠? 괜찮으니까 머리는 그만 만지고."

  "네 여기서요. 감사합니다, 기사님."

  제 얼굴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선희지가 백미러로 시원한 미소를 남기며 문을 열었다.

  철컥. 문고리가 잠긴다.

  "저기, 아가씨. 계산은 해야지."

  "아, 네. 죄송합니다. 여기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2021년이에요."

  "갑자기요? 농담도 잘하시네."

  "농담 아닙니다."

  농담이 아닌 얼굴의 의사는 환자복을 입은 선희지에게 그가 사고의 충격으로 2년의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선희지는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그거 사이비 아냐?' 공무원(B) 공개채용에 합격하여 강원도로 오리엔테이션을 가게 됐을 때 C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게 기억났다. 물론 선희지도 얼떨떨하긴 했다. 공무원(B). 원류에 대항하는 특수부대. 선희지가 공개채용에 지원하며 제출한 자료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뭘까? 신체 능력 평범. 근육량 부족. 나이는 곧 마흔인데 제대로 된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음. 집 없음. 빚 있음. '대한민국이 드디어 나 같은 사람들을 구제할 생각이 들었나 보지.' 선희지는 어깨를 으쓱이고 짐을 싸서 강원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통장에 5억이 넘는 돈이 들어 있다. 이 사실을 처음 발견하고 선희지는 거의 비명을 질렀는데, 신나서 앨범을 확인하다가 조금 기분이 묘해졌다. 2020년 여름 이후의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메시지, 카카오톡, 전화 내역을 확인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번호부에도 낯선 사람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퇴원 절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에 새까만 구멍이 생기고 원류가 넘어오게 된 지도 벌써 20년이… 그러니까 넘어가고 있다. 올해는 2020년이 아니라 2021년이니까. 의사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선희지만 두고 모든 사람이 2021년을 살아가고 있었다. 선희지는 2020년 여름에 멈춰 있는데 세상은 2022년을 준비하고 있다.

  공무원(B)는 2020년과 마찬가지로 미지에 덮인 집단이라 어디에 물어볼 데도 없었다. 국민신문고나 판에 올려볼까? 그러나 선희지는 공무원(B)에 관한 수많은 루머를 보며 비웃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만뒀다. 게다가 5억이라니. 선희지는 겁쟁이였고, 통장 잔고의 무게만큼 두려워졌다. 찝찝한 마음을 덮어두고 선희지는 신용카드를 새로 사고 비싼 호텔에 짐을 풀었다. 아는 사람들을 불러내―이들 중 몇몇은 영문 모를 얘기를 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선희지는 2년 가까이 잠수를 탄 모양이다.― 열심히 놀았다.

  선희지가 쪽지를 발견한 건 그렇게 노는 게 질릴 즈음이었다. 호텔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빨랫감으로 내놓으신 옷 주머니에 들어 있었어요. 중요한 쪽지 같아서요."

  직원이 건네준 쪽지는 회색 포스트잇이었는데, 이름과 장소, 날짜와 시각이 파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마치 약속 내지는 은밀한 접선을 은유하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이름 세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현승원.

  이름과 함께 남은 문구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선희지는 문득 정해진 시각이 20분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약속장소로 가려면 길이 안 막혀도 30분은 걸릴 터였다. 잠깐. 오늘 날짜가… 오늘 크리스마스이븐데. 아니 누가 이브에 만나자는 약속을 이렇게 은밀하게 잡아? 설마 이브에 장기 파는 사람은 없겠지? 설마. 설마 진짜로? 그런데 현승원? 여잔가? 중성적인 이름인데도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선희지는 머리를 한번 매만지고 아끼는 겉옷을 걸쳤다.

 

 

 

 

 

 

  "지각이에요."

  현승원이 말했다. 약속 장소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사람이 선희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미인이고 제법 취향으로 생기긴 했기 때문에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장기 밀매만 아니라면.).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선희지는 그 사람이 자기한테 말한다는 걸 알았다.

  "와… 미안해요. 그게… 음. 말하려면 좀 길고 제가 오늘 약속이 있다는 걸 1시간 전에 알았어요. 근데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당연하죠…. 아니, 혹시 그거…."

  "사귀던 사이였나?"

  "…네? 아뇨…."

  "아~ 그럼 친구?"

  "음… 네.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있어요?"

  "네."

  선희지는 궁금한 얼굴을 하고 현승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현승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현승원이에요. 언니의 파트너였고, 룸메이트였고요. 기억이 안 나서 혼란스럽다는 건 알아요. 제가 도와줄게요. 저랑 같이 지내요."

  마치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처럼 매끄럽게 준비된 톤이었다. 그만큼 수상하게 들리기도 했다. 선희지는 현승원과 자신을 차례로 가리켰다.

  "오… 그러니까 우리는 같이 지냈다는 거죠."

  선희지는 그제야 현승원의 겉옷이 자신의 것과 색만 다르고 같은 옷이라는 걸 눈치챘다. 선희지가 이상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걸 발견한 현승원이 조금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주 옅게 웃었다.

  "이거… 같이 산 거예요. 언니가 옷 안 버렸으면… 더 있을걸요. 못 믿겠다면 다른 걸 물어봐도…"

  "내 장기 팔 거예요?"

  "네? 네? 아뇨… 아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니…."

  "그러죠."

  "네?"

  "같이 살자고요. 그거 물어본 거 아니었어요?"

  "네? 아… 그렇긴 한데… 좋은데… 언니 이렇게 사람 덥석덥석 믿으면 안 돼요."

  "나 사람 덥석덥석 믿는 사람 아닌데?"

  그러자 현승원은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 뭐라고요?" 선희지가 귀를 갖다 대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아니. 말해도 괜찮아요. 나 궁금해 죽을 것 같은데. 네?"

  선희지가 연신 고개를 기웃거리자 현승원은 선희지의 귀에 가까이 입술을 대고는 친근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귓속말했다. 선희지는 눈을 굴리며 그 말을 듣다가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현승원이 그만 웃으라고 말할 때까지.

  "아… 그게요. 그쪽이 말한 게 영 아니라고 볼 순 없는데…. 그치만 나 사람 잘 봐요, 승원 씨."

  "…뻥이죠."

  "이거 봐! 날 잘 안다니까."

  "하여튼…."

  현승원은 선희지를 빤히 바라봤다. 꼭 익숙한 사람을 나무라는 듯한 얼굴이라 선희지는 기분이 묘해졌다. 둘 다 입을 다물자 영화처럼 거리의 온 소음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웃음소리, 걷는 소리, 뛰는 소리, 자동차의 경적, 캐롤, 캐롤, 캐롤, 그리고 "눈이다!"

  그 말은 빠르게 전염되었다. 사람들은 손을 내밀고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차창을 내리면서 지금 자기들 위로 내리는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현승원은 손을 내밀지도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불안과 기대, 반가움이 섞인 눈동자로 선희지를 가만히 응시하다 제 속눈썹을 괴롭히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제야 눈을 깜빡였을 뿐이었다.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흰 얼굴이 온통 빨갰다.

  "눈이에요."

  선희지가 말했다.

  "아…. 그러게요."

  현승원이 고개를 하늘 위로 올렸다.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건지…." 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선희지가 현승원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네? 언니, 뭐라고 했어요?" "아뇨, 아무 말도." 선희지가 빙긋 웃었다.

  "후회는 안 할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일단요. 그래서 난 어디로 가면 될까요?"

  현승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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