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테아 비앙키!"
직원이 이름을 부르자, 열차를 바라보던 중년의 여자가 앞으로 나선다. '로렌자'라는 이름표를 단 직원이 고개를 가볍게 까딱인다.
"편안한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고마워요, 로렌자."
도로테아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계단을 올랐다. 열차는 자주 관리하는지 손 닿는 곳마다 깨끗하다. 앞서 들어온 손님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를 들으며 도로테아는 창문으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해상급행열차 '베네치아'의 승강장 앞에는 여전히 구경꾼들이 개미떼처럼 모여 있다. 도로테아는 조금 전까지 저 군중 사이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베네치아에 오르기 전까지의 여정을 되짚었다.
시칠리아로 배를 타러 오는 길은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여행이 그의 폐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은 기분이었다.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빳빳한 앞치마를 두를 일도 없었다. 자신의 나라가 양시칠리아 왕국에서 사르데냐 왕국으로, 다시 사르데냐 왕국에서 이탈리아 왕국으로 합병된 뒤로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도로테아는 반도의 대부분을 남의 나라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는 그가 아는 나폴리인들처럼 자신을 이탈리아인이 아닌 나폴리인으로 여겼다. 게다가 그의 세계는 대부분 그가 일하는 공간, 집에 한정되어 있었다. 낯선 땅을 밟는 기분은 그의 예상보다 즐거웠다. 시칠리아 바다의 탁 트인 수평선을 보며 그는 드물게도 세상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도로테아는 철없고 솔직했던 시절을 생각했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남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시절을. 이제 추억은 낡았지만 그는 승강장에 도착해 기분 좋게 입가를 매만졌다. 즐거울 때만 나타나는 습관이다.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설 때는 옅은 쾌감을, 열차의 증기소리가 귀를 메울 때는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다시 좁고 고루한 평면이 되었다. 여자 하나를 두고 괴롭히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도로테아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사람을 사냥감으로 아는 남자들의 목소리. 도로테아는 환멸과 짜증을 느꼈다. 귀를 씻고 싶다고 생각할 즈음 자신의 차례가 찾아왔고, 도로테아는 열차에 올랐다.
상념을 거두고 시선을 앞으로 당긴다. 떨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젊은 여자와 그 뒤에 바짝 붙어서 낄낄대는 남자 둘. 그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모이거나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눈동자들. 남자들이 무엇을 상상하고 소망하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도로테아는 어깨를 펴고 그들을 본다. 추잡스러운 사냥꾼들과 한 명의 젊은이의 얼굴을 눈에 아로새긴다. 로렌자가 호명하는 그들의 이름은 귀에 새겼다.
베아트리체는 도로테아와 같은 칸에 배정되어 계단을 올라왔다. 복도에 서 있던 도로테아와 막 올라온 베아트리체의 눈이 마주친다. 도로테아가 눈인사를 건네자, 베아트리체는 창백한 미소로 화답하고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로테아는 그의 옆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가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다시 마주쳤을 때 베아트리체는 복도 끝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도로테아가 문을 열고 나오자 베아트리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헤맨 적 없는 사람 같은 얼굴로. 도로테아는 자연스럽게 베아트리체의 옆으로 향한다. "아까 봤었죠? 도로테아라고 합니다." 간단한 통성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나자, 베아트리체는 도로테아의 언어를 알아보았다.
"나폴리인이신가 봐요."
"그렇답니다. 알아보기 쉽죠?"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아니에요. 실례일 리가. 그리고 당신은 무례하지 않아요."
무례한 다른 존재들을 상정하는 말임을 알아차린 베아트리체의 몸이 살짝 굳었다. 도로테아는 눈앞의 젊은 여자가 조금 안쓰러웠다. 잠시 기다렸다가 먼저 입을 뗀다.
"나의 어머니는 나폴리 남자와 프랑스 남자가 다를 거라고 했죠. 내가 아가씨였을 땐, 사람들이 나폴리 남자와 로마 남자는 다르다고 하덥니다. 그런데…"
그가 언뜻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도록 고개를 기울인다.
"내가 볼 땐 거기서 거기예요. …특히 우리 여자들에게는. 나는 나폴리 남자와 로마 남자의 손을 못 쓰게 만들어 준 적이 있죠. 공평하게요."
조롱과 농담을 섞어 짐짓 뻐기는 얼굴에 베아트리체가 웃는 듯 마는 듯 입꼬리를 올린다. 그는 망설이다가 시선을 내렸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베아트리체."
타이르듯 낮게 돌아오는 목소리에 베아트리체가 시선을 든다. 도로테아는 베아트리체와 눈을 맞추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쪽이었죠? 나는 당신의 왼쪽 객실을 쓰고 있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도록 해요."
"…감사해요."
긴장과 불안으로 굳은 어깨가 둥글게 내려가다가, 순간 움츠러든다. 도로테아는 고개를 들었다. 옆 칸으로 이어지는 문을 통해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넘어오고 있었다. 그는 베아트리체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문을 등진다. 복도 끝에서 끝을 바라보고 서자 햇빛이 복도에 주홍빛 장막을 드리웠다. 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다. 두 사람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바다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노을이 지면서 태양이 바다에 긴 꼬리를 남긴다. 철로가 보이지 않아 마치 물 위를 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풍경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
베아트리체가 목소리에서 불안을 애써 지우며 말했다.
"아름답네요."
도로테아가 읊조린다. 그는 베아트리체를 이끌고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배고프진 않나요? 혼자 먹으면 참 쓸쓸해요."
남자가 사라졌다. 이름은 딘 쉘튼, 베아트리체를 추행했던 놈들 중 하나였다. 소식을 듣고 도로테아는 가장 먼저 여자가 함께 사라지지 않았는지, 베아트리체는 자리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별다른 이상을 찾지 못하자 그는 곧바로 기장을 찾아갔다. 남자 승무원들에게 말해봤자 기장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에서 나서기 전 도로테아는 옷매무새를 한 번 더 다듬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베네치아의 기장 파올로 페데리코는 뒤통수를 보인 채로 물었다. 이제 자기는 하던 대로 혼자 앞만 보고 열차나 운전할 테니 나가달라는 의사의 표시였다. 도로테아는 그의 뒤에 서서 파올로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도로테아는 직전까지 오지랖 많은 여자처럼 딘 쉘튼의 실종에 관해 떠들면서 기장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를 떠봤다. 그리고 금세 알았다. 파올로는 능동적으로 일을 해결할 생각이 없었다.
도로테아는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젊은 아가씨들과 귀부인들이 불안해하고 있어요."
"숙녀 분들에게는 피해가 없도록 승무원들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아뇨, 그 말이 아니에요. 실종된 남자랑 그의 동행인 말이에요. 그 청년들이…"
말끝을 흐리자 파올로가 한숨을 쉬었다. 도로테아는 기장이 몸을 반쯤 돌려 지루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말을 아꼈다.
"못 보신 모양이지만, 그 청년들이 여자들에게 부적절한 방식으로 지분거렸어요. 그런데 한놈은 열차를 뒤집고 다니고, 나머지 하나는 어디로 솟았는지 보이지 않지. 다들 겁을 먹었어요."
"…그래서요?"
"저 같은 사람들이야 운 좋게 오게 되었지만, 호텔 판도라의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어요. 바깥에 귀한 분들도 제법 보이덥니다. 기자처럼 보이는 양반도 있고. 조처를 하신다면 이르면 이를수록 좋지 않겠어요. 페데리코 씨는 손님들을 직접 대면할 일이 많지 않아서 모르실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이 아주… 정수리를 때려요."
"정수리요?"
"골때린다고요."
"알겠어요. 거기까지 합시다."
파올로가 도로테아의 말을 끊었다. 딱딱한 얼굴에 피곤함이 어렸다.
"여자를 겁탈하겠다고까지 말하더라고, 그 청년들요. 이만큼 살면 그래도 보이는 게 있죠. 안 할 놈인지, 할 놈인지."
도로테아는 굴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덧붙였고, 파올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파올로는 도로테아의 표정을 가늠하는 눈으로 바라보다 다시 등을 돌렸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나가 보세요. 열차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다시 객실로 돌아왔을 때는 베아트리체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간 것인지, 그 사이에 누군가 왔다 갔는지, 아니면 그저 그늘에 가려진 건지 알 수 없어 도로테아는 잠시 복도에 서 있었다. 이제 수평선은 가능성이 아니라 막막함으로, 열차는 새로운 길로 향하는 입구가 아니라 그를 가두는 비좁은 공간으로 변모했다. 나폴리가 그렇듯이, 그가 거쳐간 모든 집들이 그랬듯이. 멈추지 않고 일직선으로 달리는 열차는 도로테아에게 새로움이 아닌 고루함을 안겼다. 공연히 누구에게든 짜증을 부리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으니 대신 객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어느덧 창밖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물에 꼬리를 내린 것은 태양이 아니라 달이다.
도로테아는 갑자기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기립했다. 반사적으로 몸이 뻣뻣해졌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그를 놀라게 만든 건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밖은 이전과 같은 어둠이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도로테아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누르며 발을 뗐다.
'누굴까?'
페데리코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남자라면 로렌조가 손님들을 위한 새로운 소식을 들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 마일즈라면 문을 이렇게 두드리지 않고 벌컥 열었을 터였다. 어쩌면 아까 복도에서 만났던 사람일지도. 아니, 어쩌면…… 베아트리체일지도 모른다.
도로테아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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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탈리아, 하녀, 실내의 카멜레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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