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2021. 2. 24.

 

  나지막이 내리 누르는 듯한 발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둔탁하고, 힘 있는 소리. 그 뒤로는 소리를 죽인 발소리가 또 하나.

  소매를 당기며 표순은 앞선 자를 바삐 쫓았다. 옷자락이 걸음걸이에 맞춰 펄럭이고 내려앉고, 빳빳하게 다린 장옷과 정령의 갈기 같은 머리카락이 길었다. 어느 모로 보나 높은 곳에 위치한 자. 백요의 서기관.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표순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이 자, 자신의 상관이자 백요의 서기관인 울회현의 손짓 하나, 걸음 한번, 눈썹과 입꼬리의 묘한 다름을 짚어내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으므로.

  어깨가 살짝 돌아선다. 표순은 귀를 기울인다.

  “표순아.”

  “예.”

  “귀가해야겠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표순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난다. 울회현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비쳤다가 사라진다. 울회현은 뒷짐을 지고 표순에게 등을 졌다.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표순은 ‘이 사람은 무너지는 날에도 이리 꼿꼿하구나.’하고 생각했다.

  태수의 오른팔이 백요의 성을 떠난 날이었다.

 

 

 

 

 

 

  “강문의 솔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회현이 고개를 든다. 종이를 한쪽으로 쌓아 정리한 뒤, 공자를 들이라 일렀다. 붓이 책상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놓인다. 표순은 바깥 직원에게 회현의 말을 이르고 문밖에서 솔 공자를 기다렸다.

  근래 회현의 집에는 왕래하는 정치인이 많았다. 집에 사람을 들이기 싫어하던 그였으나, 지금에야 어쩔 도리가 없다. 성에 있는 회현의 응접실에는 곧 새 주인이 들어설 것이다. 적임자는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표순은 생각했다. 강문. 지난 살별이 떨어졌을 때 앞장서서 그를 수습했던 허술사 중 하나의 집안. 표순이 듣기로, 강문은 백요에서 중립을 자처하는 몇 안 되는 가문이다. 무명이 아니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는 가문. 회현께서 강문과도 관계를 트신 걸까? 하늘꽂이의 일이 실패했을지언정 빈손으로 돌아올 이는 아니지 않나.

  헌데, 공자는 이리도 젊나? 표순은 자신이 강문의 공자에 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 앞에 선 공자가 그를 내려다보며 인사했다. 표순은 새끼 쥐처럼 눈을 깜빡이다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선물을 들고 회현을 찾은 오늘의 두 번째 손님은 근래 보았던 손님 중 가장 젊었다.

 

 

 

  회현의 응접실에 앉아 솔은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 의외로 숲에 인접한 집이었고, 규모도 작았다. 창밖으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는 길에 본 녹음의 숲은 응접실 창을 수놓았다. 회현의 집은 솔의 집처럼 백요의 정취와는 조금 먼 구석이 있다. 나무와 풀, 먹 냄새. 회현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어울리는 듯 했다. 솔은 직접 기르고 거둔 찻잎을 선물했다. 갖가지 찻잎이 가득한 회현의 찬장에 그의 찻잎도 자리를 얻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익숙한 차향이 부드럽게 몸을 감싼다. 표순이 남몰래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 응접실은 평화로웠다. 회현과 솔은 차를 홀짝이며 서로의 근황만을 얘기했다.

  대화는 한참 겉돌았다. 솔은 회현의 사정을, 회현은 솔의 사정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고생하셨겠군.” 차가 조금 식었을 무렵 회현은 다과가 든 접시를 밀었다.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과 다른 얼굴을 한 청년이 답했다. 강직한 눈매에 날이 깃들기 시작하는 것을 회현은 알아보았다. 강문의 솔 공자는 달라졌다. 그들은 ‘살별의 천기사’였고, 살별을 쥐는 데 실패한 후폭풍을 감내해야 했다.

  “… 그래서 붓을 선물하자 그 아이가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네. 그 애가 두 번째로 그린 그림이….”

  그럼에도 오후는 한가롭게 지나갔다. 솔은 하늘꽂이 이후 학교를 지원한 일에 관해 얘기했고, 날이 선 눈매는 금세 유순해졌다. 사람을 해치지 못할 사람이다. 처져 있을 적보다 빛나고 있을 적이 많다. 순진한 사람이다. 회현은 솔이 달라진 것을 보면서도, 그리고 인간의 순진함을 믿지 않으면서도, 솔의 미래에 관해서는 회의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솔은 말을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흐르며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제 이야기가 길어져 민망해하는 얼굴이었다. 어린 천기사가 이야기하는 얼굴을 구경이나 하던 회현으로서는 지금도 족했으나 그를 말리지 않았다.

  “회현님은 힘든 일 없으십니까?”

  “역시 위문 왔나.”

  “위문이라뇨. 놀러오라 하셨으니 놀러왔을 따름입니다.”

  차를 새로 우리며 회현이 웃었다. 자기 집에 처박힌 백요의 울회현. 그를 보러 오는 사람 중엔 그를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8할은 진심이 아니지. 그러니 위문이었대도 어여삐 여길 것이거늘. 회현은 이번에도 속으로만 말을 읊었다.

  “차라리 위문이 낫지요. 내 놀리러 오는 이가 더 많으이.”

  “회현님을 놀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제는 내 누이가 몇 년 만에 걸음했지요.”

  “반가웠겠습니다.”

  “반갑긴, 이 울회현이 꼴을 구경하러 온 게지.”

  그리고 배짱 좋은 천기사들과 능구렁이 같은 천기사, 콧대가 높은 천기사들이 울회현이 집에 처박힌 꼴을 구경하러 왔다. 누이, 울너령은 어느 데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울회현의 누이였고, 또 너령이기 때문에, 겁박의 염려 없이 울회현을 놀리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회현은 자신을 구경하러 온 다른 천기사들과 너령을 함께 분류했다. 제 속을 긁기는 매한가지였으므로.

  회현의 불쾌감을 읽은 솔이 걱정스러운 낯빛을 띄었다. 회현은 솔과 자신의 찻잔을 채웠다.

  “토끼를 가져갔지요.”

  “토끼요?”

  “그래. 토끼 말입니다.”

 

 

 

 

 

 

 

  속에 뱀을 품은 토끼가 하얀 토끼를 선물했다. 회현은 토끼를 구워먹었다.

  토끼는 또 토끼를 선물했다. 회현은 토끼를 또 구워먹었다.

  세 번째 토끼는 삶아먹고, 네 번째 토끼는 새로 들인 향신료를 곁들여 끓여먹었다. 그리고 유독 뽀얗고 예쁜 다섯 번째 토끼가 도착한 날, 울너령이 놀러왔다.

  5년만에 자매를 만난 너령은 대뜸 토끼를 안아들었다. 이제껏 회현에게 도착한 토끼들은 부엌으로 직행했으니, 너령 덕분에 명줄이 길어진 셈이다. 회현은 그 뽀얗고 하얀 토끼를 오래 감상하게 되었다. 너령은 누가, 왜 토끼를 보냈는지를 물었다. “토끼가 보냈지. 삶아먹으라고.” 회현은 답했다.

  “다 내 자매의 뱃속으로 들어갔구나. 안타까운 것들.” 그리 말하면서 회현의 배를 꼬집는 손길이 매웠다.

  “왜 온 것이냐? 보기 싫은 얼굴.” 그 말에 너령은 “보고 싶어서 왔지.”하고 답했다.

  너령은 회현의 새로운 레시피를 듣다가 토끼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가져갈게.” 그건 너령의 심술이었다. 혹은 변덕이라 해도 어울릴 것이다. 회현은 허락했다. 그 역시 심술이었다. 허나 이 토끼는 변덕에서 시작했으니 변덕으로 끝나도 상관없지 않은가. 너령은 회현의 얼굴을 꼬집었다가 그 길로 내쫓아졌다. 뽀얀 토끼는 너령과 함께 초록의 요새로 떠났다.

 

 

 

 

 

 

 

  회현의 자매형제들 중에는 회현과 다른 두 사람만이 요새를 떠났다. 그 중 하나는 정령 교감자요, 하나는 숨사위꾼이었다. 너령은 초록의 요새를 떠나는 회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령 교감자와 숨사위꾼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너에겐 없다는 것을 이유로 회현을 붙잡았다. 회현은 요새를 떠나며 너령에게 넌 단지 두려웠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유란 중요치 않다고. 두려움은 회현이 잘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그가 숲에 집을 짓지 않았던가.

  회현이 초록의 요새 대신 백요를 택했을 때 백요의 곁에 있는 숲이 결정에 한몫을 했음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칠 적에, 숲은 그가 잘 다져둔 모든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너령에겐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소회였다.

 

 

 

  말 두 마리가 사람 둘을 등에 태운 채 걷고 있었다. 얼룩무늬 갈색 말과 눈이 빨갛고 몸통은 새하얀 말. 그 주인들은 제 말과 똑 닮아서, 멀리서 보아도 누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얀 말의 주인이 팔을 뻗어 갈색 말의 안장을 건드렸다. 갈색 말의 주인은 놀라 허리를 세웠다. 하얀 천기사가 입꼬리를 당겼다.

  “이리 잘 쓰시는 걸 보니 흡족합니다.”

  “…주었으니 잘 써야지. 고맙네.”

  “회현님이 써주신다면 영광이지요. 헌데… 토끼에겐 왜 그리 박하셨습니까? 보내는 족족 끓여드시고 구워드시고 삶아드시고 이제 분양까지 해주셨다니, 차라리 제게 말을 하지 그러셨어요.”

  “자네가 그리 하라지 않았나.”

  “그래도 무심하십니다….”

  꼬두람이가 과장된 탄식을 내뱉으며 슬쩍 제 배를 문질렀다. 삼백마리의 토끼 중에 가장 귀여운 놈? 회현은 새하얀 사서를 보고 기가 찼다. 가장 저를 닮은 놈을 골랐겠지. 빼꼼 올려다보는 눈초리가 잔망스럽기 짝이 없다.

  꼬두람이의 선물 공세는 회현이 집에 들어앉고 오래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말의 안장에서부터 팔찌, 독서대, 허리띠, …온갖 종류를 망라한 그 선물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회현이 보기엔 단순한 변덕이나 재미에 가까운 짓이었다. 이리 정체기를 맞은 늙은 천기사에게 그리 하는 것이 왠지 놀리는 듯도 하여, 마냥 기껍지 못했다. 게다가 그 화려함은 회현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왜 아니 쓰시나요? 묻기에 독서대 하나와 팔찌 하나를 종종 쓰노라 말했다. 너무 화려하지 않은가. 하면 꼬두람이는 당신께 어울리는 것을 고른 것이라며 침 바른 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꼬두람이가 최근에 맛들인 선물이 토끼다.

  토끼를 닮았다 했더니 토끼를 선물해. 회현은 네 마리의 토끼를 먹었고 한 마리의 토끼를 너령에게 주었다. 변덕이거나, 심술이었다.

  멈춰선 말 두 마리는 서로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회현은 그 토끼들만큼이나 꼬두람이를 닮은 하얀 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니 갈 텐가? 곧 해가 저물겠네.”

  “가야지요. 두고 가시면 안 됩니다.”

  흥. 회현이 콧방귀를 꼈다. 꼬두람이는 어느새 실실 웃음을 흘리며 하얀 말 위에 앉은 채였다. 여유롭고 느긋한 얼굴이다. 반면 승마가 익숙지 않은 회현은 수시로 긴장한 손바닥을 주물렀다. 꼬두람이는 긴장한 회현을 재밌어 하는 게 분명했다. 이 어린 천기사는 종종 상대를 건드리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사실 그런 얼굴을 하지 않을 때도 남을 툭툭 건드렸다. 그게 상대의 약점이든, 의미 없는 물건이든, 어깨든.

 

 

 

  자네는 언제까지고 그리 잘날 것 같나? 그건 회현이 어떤 어린 천기사에게 했던 말이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회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몸이 기울고, 땅이 등에 닿았다. 말은 다행히 도망가지 않았다. 손도 멀쩡히 붙어 있었고, 근육이 놀랐지만 어디 부러진 데는 없는 것 같다. 하늘은 쾌청하고 바람은 부드럽다. “아이고, 회현님. 회현님! 괜찮으십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여기 좀 보십시오. 다친 덴 없으십니까? 아이고, 제가 감히 건드리는 것이 아닌데,” 꼬두람이는 시끄러웠다. 아주 혼을 내야 쓰겠는데. 혼을 내고……

  토끼를 선물해? 깜찍한 치가 아니야.

  회현, 너는 네 삶에 만족하니? 너령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아무래도 머리를 다친 모양이다.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니, 이리 누워본 적이 있었나. 너령이 곁에 있었다면 제 팔을 꼬집었을 것이다. 부끄럽고 편안했다. 평화로웠고 수치스러웠다. 무엇보다 아찔하게 맑고 생경한 풍경이, 우스웠다. 웃겨 죽을 지경이었다.

  “…회현님? 회현님, 무섭습니다. 어찌 그리 웃으십니까?”

  꼬두람이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회현은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데굴데굴 구를 기세로 웃었다. 넘어지면서 경사로에 쓸린 등과 옆구리가 아팠다.

  “회현님 어찌 그러십니까. 제게 말을 해주십시오.”

  “…왜 웃냐니, 우스운 질문이어. 내 우스우니 웃지 않겠는가.”

  “괜찮은 지부터 말씀해주십시오… 일어나시겠습니까? 말은 탈 수 있을까요? 제가….”

  “내가 삭았나?”

  “예??”

  누워서 바라본 꼬두람이의 얼굴도 우습다. 회현은 옆구리를 붙잡고 웃었다. 이러다 폐에 바람이 들겠다 생각하면서 웃었다. 어이 없이 웃겼다. 이유를 찾는 것도 소용없었다. 꼬두람이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웃고 또 웃는 사이 꼬두람이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귀를 때렸다. 염려와 두려움과 어이없음과 우스움.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들을 회현은 아주 잘 알았다. 회현은 한참만에야 웃음을 뚝 그쳤다. 꼬두람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다 웃으셨습니까. 일으켜드릴까요?”

  회현은 긴 한숨을 내쉬고 손을 내저었다. 허리를 짚고 일어나는 회현을 꼬두람이가 부축했다. 회현은 꼬두람이의 손을 물리고 제 머리를 다시 묶었다. 옷을 털고 허리끈을 묶자 멀끔하진 못해도 볼 만한 수준은 되었다. 꼬두람이의 뒤로 달이 보였다. 해가 언제 저물었는지 모를 일이다. 

  집에 가야겠구나.

  회현은 그제야 부축을 구할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자, 돌아감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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