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릴 때 키사는 북쪽 산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산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헤루나와 두르키, 그러니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해주던 얘기는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겁주는 우화는 타타의 전문이었다. 타타는 헤루나를 기른 드워프 중 한 사람이었는데, 말재주가 훌륭해 어린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키사는 다른 아이들 사이에 섞여서 타타가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를 듣는 시간을 좋아했다. 매번 비슷한 대목에서 뜸을 들이는 타타의 버릇, 아이들의 야유, 얘기와 상관없이 이어지는 장난과 한숨과 웃음소리 같은 것들을 좋아했다.
“나중에 누가 괴물 잡나 내기할래?”
“그걸 믿냐?”
“믿겠냐? 넌 질 것 같고?”
“뭐가 됐든 내가 넌 이겨.”
헤사와 유치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타타가 집중하라며 손뼉을 쳤다.
“괴물은 귀가 밝다, 얘들아.”
며칠 뒤 헤루나가 북쪽으로 떠났다.
북쪽의 미개척지에 대한 우화와 농담은 어린아이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북쪽으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무덤을 세운다. 시신을 찾지 못해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자든 산 자든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누군가가 그 불모지에 발을 들여야 한다. 카제인 요새 북쪽. 그곳에 발을 들였다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없는 곳으로 여겼다. 떠난 사람도 없는 사람이다. 많은 이들은 헤루나가 그곳으로 떠날 때부터 그의 죽음을 예상했다.
헤루나는 자기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북쪽으로 떠나는 많은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그 불모지에서 돌아온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두려움도 공포도 모르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 북쪽으로 떠나곤 했다. 키사는 헤루나의 얼굴을 잊었지만, 헤루나가 마지막에 확신에 차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죽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지 않고서야 가족을 내버려 두고 그곳으로 떠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헤루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2.
키사는 ToB 길드원들과 함께 산을 올랐다. 헤브린이 그들에게 하이스탄을 찾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제게 어머니 같은 분이세요. 그러니… 가능하다면,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요.” 키사는 헤브린의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만나서 무슨 얘길 한다고?” 그렇게 묻자 헤브린은 꼭 자기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피했다. ‘실망하게 될 텐데.’ 키사는 생각했다. 얘기해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어떤 건 묻지 않는 게 나은데. 산을 오르는 중에도 이 길 끝에 있는 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도 하이스탄을 알지 못했다. 그가 하이스탄인지, 나시타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하이스탄도 몰랐던 게 틀림없다. 저 너머에 관해서.
하늘과 땅을 전부 가를 것 같은 커다란 균열 앞에서 키사는 살갗이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온 사방의 마력이 진동하고 자연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만 같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건 종을 불문하고 그 어떤 생물이라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살결을 떨리게 만드는 공포. 도망쳐야 한다고 몸이 외치는 경고.
균열의 열린 틈에서 밝은 빛이 쏟아졌다. 빛무리에 눈을 깜빡이기를 몇 초, 거대한 산에 비견할만한 존재가 나타났다. “베릴?” 누군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읊조렸다. 사람이라고 칭하기 어려운 거대한 존재는 오래전 균열 너머로 사라졌다는 성녀 베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균열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하이스탄은 ‘베릴’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뒷모습에서는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 ‘베릴’이 손을 내밀자 하이스탄은 두려움도 공포도 모르는 사람처럼 빛으로 다가갔다. 아름다운 것에 이끌리듯이 자연스럽게 천천히.
마을로 돌아왔을 때, 헤브린은 하이스탄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다들 괜찮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헤브린의 얼굴은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부 아는 사람 같기도,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사람 같기도 했다. “죽었다.” 라플라스의 선고가 떨어진 다음 헤브린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키사는 이미 발길을 돌렸다.
3.
“얘. 나 좀 봐라.”
키사는 못 들은 척했다. “얘. 얘. 야!” 길드 휴게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헛기침했다. 키사는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다가 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너 말이다.” 구석에 혼자 앉아 있던 누니카가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누니카는 마을 외곽에 혼자 살던 노인이었다. 마이아 마을이 초토화되자 길드원들은 누니카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에 머무르는 대신 길드 숙소에서 잘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정은 대충 알아도 키사는 누니카를 잘 몰랐다. 얼굴을 마주친 경험도 손에 꼽는다. 어색하게 옆으로 다가가자 누니카가 키사의 팔을 가볍게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언제까지 이럴 것 같냐.”
“난 모르지.”
“흥. 모를 줄 알았어.”
‘그럼 왜 물어본 거야?’ 의아해하는 키사의 손에 누니카가 무언가를 쥐여줬다. 그건 표면이 반질반질한 돌이었다. 손에 꼭 쥐고 있었는지 미적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뭐야?”
“보면 모르냐? 돌이지. 에이미한테 갖다줘라.”
“직접 줘.”
키사가 돌을 다시 누니카에게 내밀었지만, 누니카는 받지 않았다. 키사는 강경한 노인의 얼굴에 망설임과 수치심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다.
“내가 깜빡깜빡해. 내가 하나 찾아주겠다고 했다는데 이번이 세 번째야. …잊어먹은 게 세 번째라고. 그 애 말로는 그렇다는데 사실 열 번일 줄 내가 어떻게 알겠냐?”
“아하.”
그제야 어렴풋이 누니카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를 들은 게 떠올랐다. 키사는 작은 돌멩이를 손안에서 굴렸다.
“뭔데?”
“부적이란다. 괴물에게서 지켜줄 거라고 그러더라. …그런 걸 믿을 나이지.”
“형제도 믿어야 효과 있을걸.”
놀리듯 말하자 누니카가 혀를 찼다.
“난 늙었어.”
“뭐, 있잖아 지금은. 괴물.”
산에서 내려온, 그리고 균열을 비집고 나온 존재들로 인해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나날이었다. 그 말에 누니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노려보았다. 키사도 시선을 돌렸다. 바깥에는 여전히 공허의 존재들이 돌아다녔지만,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창문 너머에서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저것들도 이유가 있겠지.”
“흠.”
제아무리 눈치를 안 본다 해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판에 할 소리는 아니다. 주변 사람들 눈치가 보인 키사가 괜히 배를 긁었다. “긁지 마! 보기 안 좋다.” 누니카가 키사의 손등을 때렸다. “아!” 키사가 엄살을 피우며 손등을 마구 문질러댔지만, 누니카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또랑또랑하게 말을 이었다.
“모르니까 무서운 게야. 모르니까. 진짜 무서운 건 사람이다. 하이스탄 그 양반처럼.”
누니카의 목소리는 ‘하이스탄’을 언급하는 순간 달라졌다. 키사는 누니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하이스탄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한번 생각해 봐라. 저것들을 누가 데려왔는데? 나는 지금도 하이스탄 그 양반이 더 끔찍해! 그 양반을 그렇게나 몰랐어. 나는 가만히 집에 처박혀 있었을 뿐인데, 그 양반 때문에 전부 글러 먹었어. 뭔지도 모를 것들에 목숨을 걸어. 하여간 모험가라는 작자들은.”
“하이스탄도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을 뱉은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스탄을 위해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느낄 배신감은 자기가 느끼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누니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뭐라도 말을 하고 싶어서, 왜인지 속이 불편해서….
“뭐?”
누니카가 눈을 치켜떴다.
키사는 누니카의 돌멩이를 냅다 분수대에 던져버렸다. “노인네가 뭘 안다고?”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고향의 언어로 빠르게 욕설을 지껄이면서 광장을 돌기 시작했다.
광장을 네 바퀴 정도 돌고 나자 민망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키사와 누니카의 말다툼에는 논리도 없었고, 나중에는 유치한 인신공격만 남았다. 그조차도 키사는 말이 딸렸다. 점수를 매긴다면 분명 졌다. “얘. 다 들었다. 너 집 나왔댔지? 그러게 집 나가면 고생이라지 않냐.” 누니카가 이렇게 비아냥댔을 때는 꼭 같은 말을 하던 헤사 할라라가 떠올라서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유치한 말로 싸우는 사이 휴게실의 공기가 얼마나 거북해졌는지…. 길드 건물 밖으로 나온 것도 사람들 시선이 뒤통수를 뚫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에이미한테 갖다줘라.’ 키사는 마지막 양심을 쥐어짜 다시 분수대로 다가갔다. 하이스탄이 세웠다던 베릴 조각상이 보인다.
사실 키사는 누니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이스탄에게 이유를 묻고 싶은 사람들도,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헤브린도 이해했다. 어린 날의 자신이 꼭 그랬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이스탄도 베릴에게 말하고 싶은 게 남아서 그런 짓을 벌였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죽어서 떠나버린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사람에겐 아무것도 물을 수 없다.
아무것도.
“아… 망했군.”
사람은 그렇다 치고 이 돌멩이는 왜 안 보이는 건지. 키사는 바닥에 쌓인 동전들을 손으로 헤집다가 바지를 걷고 분수대 안으로 들어갔다.
'로그 > 키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벤트 (01.19~01.23) (0) | 2024.05.15 |
---|---|
셀 수 없는 답 (0) | 2024.05.15 |
이벤트 (01.11~01.18) (0) | 2024.05.15 |
주점의 미덕 (0) | 2024.05.15 |
소망의 나무 토벌 (0) | 2024.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