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헤사
“그래, 이럴 줄 알았다!”
헤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찼다. ‘그래. 나도 네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키사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발을 막았다.
“작작 해!”
“진짜 작작 해야 하는 게 누군데!”
잽싸게 상체를 일으킨 헤사가 이마를 부딪쳐왔다.
“이 김에 뭐 좀 묻자. 남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건 왜야?”
키사가 주춤거리는 사이 이번엔 헤사가 키사를 넘어뜨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뀐다. 헤사가 비아냥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새 가족이라도 만들고 싶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가?”
네가? 그 한마디에서 키사 할라라는 헤사 할라라가 하지도 않은 말들을 연이어 떠올렸다. 집을 나간 네가? 두르키를 두고 떠난 네가? 여기까지만 해도 됐을 텐데 머릿속의 말들은 제멋대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그들 형제는 싸우면서 자랐다. 이유는 대체로 보잘것없었고, 키사도 헤사도 그들이 왜 싸웠는지를 자주 잊었다. 두르키는 아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키사는 어떤 어른이 ‘배우자가 죽어서’ 두르키가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거라며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상처받지는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루나가 살아있을 때도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헤루나와 두르키는 아이들을 사랑했고, 다른 많은 어른처럼 아이들을 기르는 법을 배우며 살아갔다. 때론 뿌듯해하고 때론 실수하면서. 다만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고 굴뚝 같이 믿고 아이들의 일은 두 아이가 해결하게 내버려 뒀을 뿐이다. 그들은 몸을 부대끼며 싸우는 것을 두렵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제 아이들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다르게 컸다. 헤사가 검술 연습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키사는 타타에게 연금술을 배웠다. 키사가 낮잠을 자는 동안 헤사는 다른 이들과 주먹이나 검을 맞댔다. 두 아이의 검술 실력에 격차가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 때보다 빈도는 줄었지만, 그래도 두 아이는 가끔 싸웠다. 헤사는 검을 쓰지 않아도 키사를 곧잘 이겼다.
하루는 또 쓸데없는 이유로 둘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키사의 눈에 윈제가 들어왔다. 윈제는 키사에게 툭하면 시비를 거는 옆집 아이였는데 대놓고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뭘 봐?’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 딴생각 하냐?”
막 키사를 넘어뜨린 헤사가 말했다.
“너 질질 짜게 만드는 생각.”
유치한 대꾸에 헤사가 피식 웃었다.
“네가?”
네가 뭘 한다고? 뭘 안다고? 네가? 헤사는 늘 그런 식으로 키사의 속을 긁었다. 키사는 손바닥 밑에 까슬거리는 모래의 촉감을 느꼈다.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키사는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고 헤사에게 뿌렸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헤사가 욕지거리했다.
“미쳤냐?”
키사는 헤사의 일그러진 표정을 감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쇠가 부딪혀 나는 예리한 소음과 바람을 가리는 소리를 들었다.
형제가 어렸을 때 헤루나와 두르키는 두 아이의 싸움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하루는 헤사가 무릎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집에 돌아왔고, 하루는 키사가 소매를 빨갛게 물들인 채로 돌아왔다. 보다 못한 두르키가 왜 싸웠냐고 물었지만, 두 아이는 싸운 일에 관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지 않았다. 두르키는 그것이 자존심의 문제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추궁을 그만뒀다. 얼추 맞았다. 말하기에도 쪽팔린 이유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야, 이번엔 어물쩍 넘기지 말고 제대로 답해.”
헤사는 단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키사의 귀에서 반뼘도 떨어지지 않은 자리였다.
“이번 일 끝나면, 같이 집으로 돌아갈 거지?”
헤사의 얼굴은 온갖 감정을 꽉꽉 눌러 담은 석고상 같았다. 어쩌면 분노, 어쩌면 원망, …. 하지만 키사는 입을 열지 않고 물끄러미 헤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까지처럼. 말없이 집을 나가고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모르는 체하고 툭하면 핑계를 대기 바쁜 뺀질거리는 얼굴. 그것이 늘 헤사의 속을 긁었다.
“야.”
“….”
“대답해.”
이번엔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걸 둘 다 알았다. 두 사람은 이날 그들이 왜 싸웠는지, 그 이유를 절대 잊지 않을 터였다.
“뭐, 안 하면 죽냐?”
그 사실을 뼛속 깊이 체감하면서도 못나게 굴게 되는 건 왜일까?
남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이유. 누구는 형제한테 뿔난 탓이라 하고 누구는 형제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냐고 하고 누구는 악취미라 한다. 이유는 보잘것없다. 발음이 마음에 들어서. 쓰다 보니 재밌기도 했다. 가끔 어색해하고 딴지 거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귀찮은 정도는 아니고. 헤사가 마이아 마을에 오지 않았다면 그 호칭을 걔랑 엮는 사람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걔는 왜 모든 걸 가족이랑 엮지? 나는 그럴 생각이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가족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도 생각이란 걸 한다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아니 걔는 맨날 이번 일만 끝나면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서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든다. 두르키도 우릴 그런 식으로 채근한 적은 없는데. 두르키에게는… 미안해. 걱정도 된다. 헤사 걔가 이런 식으로 쫓아와서 달달 볶지만 않았어도 내가….
뭐, 이건 핑계라는 건 나도 안다.
실은 두렵다. 요새로 돌아가 두르키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날이, 그래서 내가 저지른 잘못에서 도망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날을 미루다가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키사가 답한 건 헤사가 완전히 자리를 떠나려던 무렵이었다.
“… 갈 거야.”
쉰 목소리가 났다. 키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옆구리가 욱신거린다. 통증으로 키사가 욕을 지껄였지만, 헤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키사는 자존심이 상했다. 당장 일어나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답하고 싶었는데 지쳐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완전히 진 기분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가장 열받는 건 키사가 단지 무서워서 답을 미뤄왔다는 걸 헤사도 알 거라는 사실이다. 두르키도 예상했을 테다. 그들은 키사를 알았다. 키사가 그들이 상처받았으리라는 걸 알고 있듯이.
“제대로 약속해라.”
헤사가 말했다. 키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다음에 약속한 일들만 끝내고.”
“하여간 우선순위가 지….”
“아, 알겠다고!”
“허.”
빌어먹게 얄미운 형제 앞에서는 쉬운 말들도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키사는 시야 끝에 헤사의 머리카락이 다시 들어온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약속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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