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 오프로드
2024. 10. 21.

※​교통사고 묘사가 등장합니다

OFF-ROAD

“안톤. 어디에 걸었어요?”

“래디컬 하운드.”

“의외네요. 거긴 신참이래요.”

“줏대 있잖습니까, 이름이. 사이코 씨는 어디에 걸었어요.”

“마젠타 핑키요.”

“왜?”

“저번에 날 배신해서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려고.”

스크린 속에서 구시가지를 질주하는 마젠타색 모터사이클을 보면서 파티마가 말했다. 마젠타 핑키 옆에는 래디컬 하운드, 블랙 무스, 블루 래빗 등이 앞다투어 달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앉을 데가….” 파티마는 막 출발선을 떠난 차량들에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 똑바로 달려!” 바로 옆에서 누군가 귀가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잖아요!” 파티마가 면박을 줬지만, 파티마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금세 묻혔다. “거기 조용히 해요.” “아, 난리….” “저기요.” 웅성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파티마와 안톤은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저쪽으로 갑시다!” 안톤이 앉을 자리를 포기하고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루인 랠리(Ruins Rally)’라고 적힌 간판이 붙어 있었다.

‘루인 랠리(Ruins Rally)’는 거주민이 없는 도시 유적(City Ruins)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모터사이클 경기다. 도시 유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오히려 그 점이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본디 불모지를 개척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너진 건물과 구조물 사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도로를 달리는 모터사이클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루인 랠리는 올해로 1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포츠였다.

루인 랠리의 규칙은 세 개였다. 첫째, 신호에 맞춰 출발할 것. 둘째, 다른 차량과 접촉하지 않을 것. 셋째, 결승선까지 달릴 것. 모터사이클 개조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후원자를 등에 업고 앞다투어 모터사이클을 더 빠르고 강력하게 개조한다. 루인 랠리는 점잖은 스포츠는 아니었다. 괴수의 출몰로 동선이 꼬인 레이서들끼리 부딪히거나 개조한 모터사이클이 폭발하는 등 예측할 수 없는 사고가 잦았다. 매회 사상자가 나왔지만 사람들에게는 그조차 스포츠였다. 루인 랠리는 위험할수록 매력적이었다. 레이서들이 위험을 안고 과거의 도시를 달릴 동안 사람들은 안전한 건물 안에서 판돈을 걸었다.

파티마 사이코는 경호 업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경호 대상인 안톤은 도시 개발자였다. 안톤은 근래 유동 인구가 많아진 아웃스커트 인근 도시 유적을 살펴보러 나왔다. 온종일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루인 랠리를 찾았다. 겸사겸사 약간의 유흥도 즐길 생각이었다. 안톤은 오락이란 걸 모르게 생겼지만, 파티마가 제안하는 행선지를 거절한 적이 없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모터사이클들을 구경하며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인파 사이에서 손을 뻗어 파티마의 소매를 붙잡았다. 파티마는 단번에 그자를 자기와 안톤 사이로 끌어왔다.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도미노. 물건은?”

도미노라 불린 이가 두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안톤은 안경알 너머로 눈인사를 보냈다. 도미노는 모래가 잔뜩 묻은 모자를 털고 턱짓으로 문가를 가리켰다.

“당신 차.”

첫째, 신호에 맞춰 출발할 것

파티마는 검은색 차량의 트렁크를 열었다. 그곳에 파티마와 안톤이 원하던 것이 있었다. 상자에 담긴 물건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파티마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카메라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안테나 같은 것이 달린 기구였다.

“어떤 용도예요? 예쁘네.”

“나도 잘은 몰라. 설명서는 넣어뒀어.”

도미노가 말하는 ‘설명서’란 유물 감정서와 비슷한 것이다. 유물을 감정한 자도 가져온 자도 이것을 가져갈 자도 치안국에서는 알지 못하겠지만. 상자에 담긴 유물은 안톤과 파티마의 손을 거쳐 돈 많은 고객들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 안톤과 파티마가 도시 유적까지 나온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루인 랠리는 세 사람의 약속 장소였다. 비교적 안전한 공간이면서 계급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섞인 공간. 파티마와 안톤은 도미노에게 더 묻지 않고 상자를 트렁크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들은 이 일을 오래 했고 서로를 신뢰했다.

“다음엔 내가 연락할게. 난 루인 랠리는 별로야….”

계산이 끝난 후 도미노는 챙이 넓은 모자를 꾹 눌러 쓰고 자리를 떠났다. 파티마는 트렁크를 닫고 베라를 불렀다.

“베라!”

레이서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이 뒤를 돌았다. 장총을 멘 베라가 시원스레 손을 흔들어 보였다. 파티마는 실적이 좋은 에스퍼였지만, 어디까지나 보조로서 뛰어난 정도였다. 안톤을 경호하는 데는 사람이 더 필요했다. 그 사람이 유물 밀수에는 필요가 없대도 말이다. 베라는 경력 8년 차의 에스퍼였고 안톤과 파티마의 일에 합류한 지는 반년이 되었다. 그동안 아직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베라는 안톤과 파티마가 옮기는 물건에 관해 묻지 않는 대가로 수익의 5%를 받는다.

두 사람에게 걸어오던 베라가 갑자기 장총을 들었다.

“뒤!”

베라가 외쳤다. 파티마는 반사적으로 깊게 숨을 들이켜고 입을 모았다. 이명처럼 울리는 휘파람 소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귀를 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달렸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차들. 모터사이클의 바퀴가 요란하게 굴러가는 소리. 사람들은 줄지어 차를 몰 생각이 없었다. 모터사이클 한 대와 트럭이 충돌한다. 뒤를 따르던 차들이 브레이크를 밟고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아비규환이었다. 그 사이에서 파티마는 확성기를 들고 경고음 같은 휘파람을 다시 불었다. 괴수를 멈추기 위해서였다. 등을 돌리자 5m 정도 거리에 떨어진 괴수의 흰 눈동자가 파티마를 경계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발치에 래디컬 하운드를 몰았던 레이서가 쓰러진 채로 피를 토했다. 그는 오늘의 우승자였다.

“안톤, 들어가 있어요.”

“예.”

제자리에 얼어 있던 안톤이 얼른 차에 탔다. 파티마는 괴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주 천천히 걸었다.

“쉬…. 옳지. 이쪽으로 와. 그래.”

괴수는 주춤거리다가 파티마를 따라 옆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좀 더.” 뒤에서 베라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괴수는 몸집이 커서 베라가 있는 곳에서는 그 머리통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흥분해서 날뛰기라도 하면 모인 사람들이 다칠 확률이 높아진다. 다행히 이곳은 실외 주차장이었다. 당장은 당황한 사람들의 차가 여기 묶였지만, 시간을 벌면 그들은 알아서 주차장을 빠져나갈 것이다. 베라는 적당한 사격 지점을 찾기 위해 거리를 쟀고 파티마는 괴수를 주차장 밖으로 유인했다. 마침내 햇빛 아래로 나오자 괴수는 커다란 몸을 약간 굽혔다. 꼭 파티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커다란 눈에 담을 것처럼 말이다. 아니, 냄새를 맡는 걸지도 모른다. 약 2분 동안 괴수와 대치하면서 파티마는 괴수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다.

처음 보는 괴수였다. 유적에 터를 잡고 사는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모래 바다에서 흘러 들어왔겠지. 등급이 어떻게 될까. N 등급? A 등급? S 등급은 확실히 아니다. 파티마는 침착하게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제 심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됐어.” 준비된 베라가 말했다.

“잠깐만.” 파티마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뭐?”

괴수의 머리통을 노려보고 있던 베라가 고개를 약간 들었다. 파티마는 답하지 않았다. “기다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괴수에게 하는 말인지 베라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괴수는 어느새 파티마와 2m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왔다. 파티마는 입술을 오므려 한 번 더 휘파람을 불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묘하게 결이 달라진 소리에 괴수가 귀를 기울였다. 파티마는 괴수의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괴수의 커다란 눈이 파티마에게 가까워진다….

정적을 깨트리는 총소리. 괴수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베라의 총알이 괴수의 머리를 꿰뚫었다. “물러나!” 베라는 몸부림치는 괴수를 향해 총을 몇 번 더 발사했다. 괴수의 육중한 몸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진다. 파티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쳤어?”

파티마가 벼락처럼 날카롭게 외쳤다.

“고맙다고? 그래.”

베라가 어깨를 돌리면서 다가왔다. 파티마는 괴수의 살점과 피를 뒤집어쓴 채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좀 닦아야겠다.”

베라는 괴수가 확실하게 죽었는지 확인하고 물과 수건을 얻어왔다. 그때까지도 파티마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파티마.” 베라가 재촉했다. 주변에는 아직도 구경꾼이 남아 있었는데 이런 광경은 남들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괜찮아?” 파티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라는 이때서야 파티마가 화가 났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화가 난 사람에게 하면 조금 위험한 질문을 입에 올렸다.

“왜 그래?”

파티마의 얼굴이 훽 베라를 향해 돌아갔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얼굴이었다.

“내가.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둘째, 다른 차량과 접촉하지 않을 것

“미안하다니까. 설마 집 봐주기로 한 것까지 무를 건 아니지? 아내가 기대하고 있어. 너만 한 사람 없댄다.”

베라가 운전석에 앉으면서 투덜거렸다. 파티마는 쾅!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 닦는다고 닦았지만, 머리와 옷이 아직도 더러웠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베라가 자길 기다려주지 않았다는 거였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괴수는 파티마가 목구멍까지 총을 들이대도 얌전히 있었을지 모른다. 괴수를 죽이는 역할을 하지 못해 아쉬운 건 아니었다. 파티마는 괴수가 심장을 제게 맡긴 것처럼 순종적으로 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순간을. 거의 다 됐는데! 베라는 파티마가 괜한 일에 성을 낸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파티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톤은 파티마와 베라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기류를 모르는 척하고 창문을 열었다. 냄새가 지독했다.

“약속은 지켜. 근데 자기? 그건 그거고 이 일은 오늘로 끝내자.”

“… 뭐? 무슨 말이야?”

“알아들었잖아. 너 성질 더러워서 같이 못 해 먹겠어.”

“내가? 내가? 내가 성질이 더럽다고? 파티마. 장난해?”

파티마는 베라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봤다.

“안톤. 다음부터 운전석에 앉는 사람 바뀌어도 상관없죠?”

“…출발 안 하나요? 곧 해가 지겠습니다.”

안톤은 천으로 안경을 문질러 닦으면서 조용히 대꾸했다.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미안해요. 베라, 출발해.”

파티마가 말했고 베라는 한손으로 운전대를 치면서 욕설을 뱉었다.

30분 뒤 그 일이 벌어졌을 때도 파티마와 베라는 싸우고 있었다. 이야기가 약 4년 전의 치정 싸움까지 흘러가자 듣다 못한 안톤이 조용히 좀 해주면 안 되겠냐고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차체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세 사람의 시야가 흔들리고 몸이 반동으로 들썩였다. 바퀴가 급하게 돌아가면서 요란한 굉음을 냈다. 여긴 왜 도로가 이따위야? 이런 식이니 레이서들이 죽어 나가지. 파티마는 그때 생각했다.

파티마는 에어백에 파묻힌 머리를 들었다. 몸이 저릿저릿하고 목이 뻐근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루인 랠리 관계자들이 아직 수거하지 않은 표지판이 차에 부딪혀 애처롭게 꺾여 있는 게 보였다. 파티마가 에어백을 치우면서 더듬더듬 물었다.

“다들 괜찮아요?

“전 괜찮습니다. … 그쪽은요?”

뒷좌석에 있던 안톤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파티마는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베라는 신음과 욕설을 함께 내뱉었다.

“멀쩡하네요.”

“네 눈엔 멀쩡해 보여? 내 눈엔 피가 보이는데….”

“베라. 자기, 살아 있잖니.”

파티마는 베라를 어르듯 말했다. 베라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누가….” 베라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점심으로 먹은 것을 게워냈다.

사고는 순전히 엘리엇의 잘못이었다. 엘리엇은 회색 차의 주인이다.

세 사람의 차가 구시가지를 한창 달리고 있을 때였다. 회색 차가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와 운전석을 박았다. 속력은 또 어찌나 빨랐는지. 파티마는 회색 차가 제 차보다 구리지 않았다면 베라가 다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파티마가 창문을 두드렸을 때 엘리엇은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다치거나 기절한 것이 아니었다. 엘리엇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이런. 환자가 둘이네. 안톤?” 다행히 엘리엇을 진정시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화 끝에 세 사람은 엘리엇의 차에 옮겨 탔다. 파티마의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 두 사람은 차를 안 모는 게 좋겠네요.” 운전대는 파티마가 잡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라고요?”

“헤븐스게이트요.”

“거기 가깝나?”

“근처입니다. 오늘 본 데까지 도시를 확장하면 헤븐스게이트와 연결되는 철로가 생길 수도 있겠죠.”

안톤이 엘리엇 대신 답했다. 엘리엇은 멀리 공장이 보이는 쪽을 가리켰다.

“나는 운이 좋았어요. 센세이션으로 갈 거였고, 차가 있었고. 하지만 그건 너무… 너무 이상했어요. 갑자기 괴수가 나타나서…. 놀라서 그랬던 거지 정말 고의가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진정해요.”

엘리엇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헤븐스게이트에서 차를 몰고 나오던 엘리엇은 이상한 괴수를 목격했다. 정말 처음 보는 이상한 괴수였다.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한 나머지 마음이 진정이 안 돼서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오게 되었다. 조금 엉성한 이야기였다. 중간중간 말을 빠트렸지만, 파티마는 그가 헤븐스게이트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사람을 차로 쳤다는 걸 눈치챘다. 경황이 없어 허둥대다가 사고를 친 거겠지. 이상한 괴수의 등장에 사람을 치고 도망 나왔는데 그 와중에 또 사고를 냈다. 파티마는 연이은 사건으로 자괴감과 공포에 물들었을 엘리엇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엘리엇은 파티마와 베라가 에스퍼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묘한 반응을 보였다. 치안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거북한 모양이었다.

“궁금해지네요.”

“네?”

엘리엇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파티마는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이상한 괴수였길래요?”

“사람을…. 사람 같았어요. 그, 생긴 게….”

“농담해요?”

속이 안 좋다며 침묵을 지키던 베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파티마와 비슷한 추측을 하고 있던 베라는 ‘괴수를 봤다.’는 엘리엇의 말마저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농담 아닙니다!”

엘리엇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파티마와 베라의 단말기가 동시에 울렸다.

셋째, 결승선까지 달릴 것

네 사람을 태운 차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센세이션에 도착했다. 치안국 통신망에는 헤븐스게이트와 관련된 소식들이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엘리엇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로 헤븐스게이트에 사람을 닮은 괴수가 나타났다. 베라와 파티마에게 그보다 놀라운 소식은 파견된 에스퍼들이 괴수를 물리치는 데 실패했다는 거였다. 헤븐스게이트가 점거되었다는 얘기에 엘리엇은 자기가 운이 좋았다며 몸을 떨었다. “덴버가 누구처럼 화가 났겠어.” 베라는 치안국장 엘레노어 덴버를 언급했다. 엘레노어 덴버는 강경파로 유명한 국장이었다. 파티마는 생각에 잠겨 ‘누구’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인터넷의 사람들 역시 엘레노어 덴버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대처할지를 두고 떠드느라 바빴다.

“계엄령 통과됐대.”

잠시 후 뒷좌석에서 단말기를 들여다보던 베라가 말했다. 속이 안 좋다며 끙끙대던 베라는 차가 센세이션에 진입한 이후부터 단말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센세이션은 아웃스커트(Outskirts)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도시였으나 도시 유적에 비하면 훨씬 환경이 나았다. 오프로드에 적합하지 않은 엘리엇의 차는 오는 내내 덜컹거리다 잘 닦인 도로 위에서야 조용해졌다. 베라의 속도 한결 편해진 모양이다. 파티마는 신호를 기다리며 운전대를 톡톡 두드렸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지네. 토벌 얘기는 없어?”

“하려고?”

“뜨는 거 봐서.”

“왜. 걔한테도 기다리라고 하게?”

“자기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베라와 파티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엘리엇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어깨를 굳히고 두 사람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뒷좌석에서 노트북으로 보고서를 쓰던 안톤은 헤드셋을 꺼냈다.

“넌 꼭 사람 엿먹이고 싶을 때 그런 식으로 말하더라.”

“어머. 내가? 자기가 그런 게 아니고?”

“아 토할 것 같아.”

“그럼 적당히 해.”

“네가 ‘자기’라고 할 때마다 ‘엿 먹어’ 이러는 것 같다고.”

“눈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야, 베라.”

다행히도 두 사람은 1차전까지만 하고 싸우는 걸 관뒀다. 엘리엇이나 안톤을 의식한 건 아니었고 순전히 지쳤기 때문이다. “새해부터 운이 안 좋네.” 파티마가 그렇게 말할 무렵에는 둘의 목소리도 차분해졌다. 지난한 하루였다. 한동안 모두에게 달가운 침묵이 흘렀다. 차 안에는 안톤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베라. 거의 다 왔어.”

파티마가 룸미러로 베라를 흘긋 보며 말했다. “그래.” 베라는 엘리엇이 건네주었던 음료를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룸미러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파티마. 다 알겠는데. 그냥… 정말 적당히 해라. 너 아까 위험했어.”

“… 그래.”

“끝났군요.”

안톤이 이렇게 말했을 때는 밤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들은 베라를 큰 병원에 데려다준 뒤 그들 두 사람도 각자 검사를 받았다. 엘리엇은 검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안톤이 안다는 호텔로 안톤과 파티마를 데려다주었다. 파티마는 엘리엇에게 연락처를 받고 그의 트렁크에 옮겨 실었던 상자를 밖으로 꺼냈다. 엘리엇은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역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엘리엇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베라도 파티마도 안톤도 없는 호텔을 찾아 떠났다.

“안톤. 나 당분간 힘들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바쁠 예정입니다. 한… 두 달 정도. 도미노에게는 제가 말해두죠.”

“고마워요.”

“두 달이면 충분하겠죠. 새 차와 운전자를 뽑기에 말입니다.”

안톤 나름의 농담이었다. 파티마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재밌다기보다는 농담과 웃음을 주고받으면서 하루의 긴장을 풀고 싶은 마음이었다.

“난 가만히 팔짱 끼고 구경하는 걸로는 역시 성에 안 차나 봐요.”

“사이코 씨 성향은 잘 압니다. … 처음부터 물건도 꼭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잖습니까. 덕분에 일이 늘었습니다만.”

“우리한테 떨어지는 돈이 많아진 거죠.”

“어쨌든.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두 달 뒤에 뵙죠.”

안톤이 상자를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파티마가 울상을 지었다.

“나 약속 놓쳐서 혼자 저녁 먹게 생겼는데. 같이 안 먹어줄 거예요? 새해 저녁 혼자 먹어요?”

“하루가 길었습니다. 그럼.”

안톤은 미련 없이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혼자 남은 파티마는 단말기에 새로 업데이트된 소식이 없는지 확인하며 복도를 걸었다. 저녁은 룸서비스를 시켜야겠다. 새해 인사들은 피곤하니까 저녁 먹은 뒤에 다시 봐야지.  2257년 1월 1일. 파티마는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다. 두 달 뒤는 물론이요, 그 이후의 일도.

두 달로 마무리하기에는 긴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파티마 사이코는 출발선에 섰다. 앞은 오프로드(off-road)였다.

 

 


오프로드(Off-road): 도로가 아닌 곳. 비포장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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