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자적심
2021. 2. 26.

불신

 

 

  "4인의 선인은 그대들이 아는 것 처럼 영웅이 아니네. 그 마지막 결전지였던 마을의 모두가 그들 때문에 죽었지. 믿지 말게."

  원혼은 그 말을 남기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무량은 선인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았으나, 그 말에서 하나만은 잊을 수 없었다. '믿지 말게.'

 

 

 

  마을은 무너졌다 복구되길 반복했다. 광장의 나무가 바람에 부러졌으며, 천둥이 치고, 숲의 나무는 비틀려 자랐으며 비무장 옆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형체 없는 것이 발자국을 남길 적에는 그 자국을 따라가 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가 보고 싶었던 바다는 모래사장까지 집어삼켰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안개 너머에서는 붉은 불빛이 번쩍였다. 그 너머론 차마 갈 수 없었다. 마을의 끝과 끝조차 그 방향을 알 수 없이 뒤엉키던 때였다. 무량은 안개 너머로 출발했다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 두려웠다. 안개를 바라보고 있으면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원혼들은 제자들 곁에 머물렀다. 언제는 울고 떼를 쓰고 죽이려 들더니, 또 근래에는 마치 육신 있는 사람처럼 걷고 떠들고 누웠다. 눕는다니, 무량은 그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죽은 것들이 누웠다 떠난 자리를 한 번씩 돌아 보았다. 때때로 다른 제자들이 원혼들을 위로하여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모양이었으나, 원혼들이 사라진 자리는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리고 붉은 달이 떴다. 집이 자꾸 무너졌으므로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요즈음 그들은 자꾸만 눈에 띄는 이상현상들에 관해 토론하곤 했다. 누구에겐 보이고 누구에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량은 습관처럼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밤중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웠고, 자고 일어나면 누가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쪽잠을 자다 깨어 있길 반복했다.

  일기를 쓰면서 무량은 그들이 유령이 아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쪽짜리 믿음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한낮에 그는 꿈을 꾸었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렸고, 무량은 그곳에 있었다. 바로 곁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누구인지 알 수 없어 한참동안 숲을 배회했다. 몸이 뜨거웠다. 뛰고, 또 뛰다 마을로 돌아왔고, 그는 또 뛰었다. 마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몸이 차갑게 식었고, 무량은 이제 천천히 걸었다. 휑한 비무장에 서서 벽에 긴 손톱 자국을 남길 때까지…… 그러고 보니 그는 울고 있었다. 꼭 새의 울음소리 같다. 안개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그는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꿈 속의 제 울음소리가 귀곡새의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친 건 자신이 아닐까? 무량은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일기를 써야 했다.

  옆구리가 화끈거린다. 골반에서 시작한 저주의 흔적은 이제 옆구리, 배로 확장되고 있었다. 하필 마경 안에서 그 부위를 다친 이후로 매일 통증이 계속되고 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쓴다.

 

  하필 저주가 남은 곳을 부딪혀 확장되는 속도가 빠른 건지 의심스럽다. 우선 약을 발라 두었다. 작약 뿌리가 진통 효과가 있다 해서 캐 왔는데, 그건 아직 못 쓰고 있다. 그냥 달여 먹으면 될까. 요즘은 십 년을 헛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안개 속에서 헤맨 시간을 제하면 그 세월마저 반토막이 나겠지만.

  의심스럽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 있는 듯 하다. 나의 환상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무모하고, 안 됐고, 잘 다친다. 사람을 너무 덥석덥석 잘 안고, 잘 믿고... 조금 믿어 보기로 했다.

 

 

 


미신

 

 

 

 

  "뭔가 재밌는 이야기는 없습니까?"

  소운이 술잔을 부딪치면서 물었다. 그들 사이에는 탁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술병과 술잔이 있다. 술잔은 금세 비워졌다 다시 채워진다. 각기 다른 십 년을 보낸 뒤 재회한 그들은 평범한 청년 둘처럼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심란한 일들은 이미 안줏거리로 올렸으니, 다른 것을 먹어 볼 때였다. 아직 달이 노랗고 바람은 가벼웠다. 소운은 직접 밥을 해 먹었다가 아주 아팠던 이야기를 해 주었고, 무량은 그를 기꺼이 안주로 삼았다. 소운의 이야기 하나에 무량의 이야기 하나. 그것이 규칙이었으므로, 무량도 이야기를 시작했다.

  "혼례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십 년 사이에 말이죠. 여기서도 웬 혼례인가 우스워서 구경도 하고 밥도 얻어먹었죠."

  술잔을 톡톡 두드리며 무량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밥을 먹다 보니 조금 이상한 것이 있더군요. 다른 이들 밥은 조밥인데 내 밥만 팥밥이었습니다. 팥을 언제 먹는지 아십니까?"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먹는 게 아닙니까?"

  "예.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밥만 팥밥이기에 무언가 찝찝함을 안고 돌아갔죠."

  사람 아닌 것들과 이상한 서주에서 살 때, 그곳의 '사람'들은 무량을 축제에 자주 초대했다. '객이 오셨으니 먹을 것을 내어 드려야지.' 그곳에서 몇 년을 머물든, 그들은 무량을 손님처럼 대했다. 그날도 그랬다. 소운에게 말하지 않았고, 적야의 제자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날 혼례의 주인공은 지해 사저였다. 뒤틀린 서주에서 지해 사저는 위정성을 떠났고, 몇 년 뒤 상인과 결혼했다. 다른 사저의 그림자에 이미 한 번 먹힌 적 있던 무량은 지해 사저의 앞에 나서지 않았다. 삿갓은 그럴 때 유용했다. 무량은 갓을 푹 눌러 쓰고 밥을 얻어먹었다.

  "좋은 징조가 아니거든요. 그날 숙소로 돌아가며 문득... 하늘을 보는데 달이 참 빨리 떴습니다. 행인에게 물어 보니 그날이 동지더군요."

  여기서 무량은 말을 멈추고 소운을 보았다. 이야기의 대목을 앞두고 뜸을 들이는 꾼처럼.

  "왜,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으면 잡귀를 내쫓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하지 않습니까. 어찌 내 것만 팥밥이었을까..."

  무량은 술을 바닥에 흩뿌렸다. 소운은 손으로 제 어깨를 털어낸다. 끝이 깔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지요.....?"

  "나는 이야기 만드는 재주는 없어요. 사 년 전인가 있었던 일입니다."

  소운은 질린 표정을 지었고, 무량은 조금 웃었다.

  "환영이 되려 사람을 귀신 취급한다니 저 같았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난리가 났을 겁니다..."

  "뭐, 덕분에 정신은 확 들었죠. 그 전날만 해도 술독에 빠져 있던 터라."

  무량은 농담처럼 진담을 말했고, 그 뒤로는 다시 가벼워졌다. 바닥에 술을 덜어내고, 어깨를 손으로 털어낸 것처럼, 삿된 것들의 이야기도 그렇게 털어내어 버리면 되었다.

  "소운... 괴담 무서워합니까?"

  그들은 술잔을 다시 채웠다.

 

 

 

 

 

 

 

  "빌어먹을, 무슨 놈의 원혼들이 이 따위로 사람을 엿먹여."

  "젠장."

  "제기랄.."

  "후레 같은 것들..."

  끊임없이 욕을 하면서 숲을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을 잃었다. 자꾸만 열이 뻗쳐 얼굴에 피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고분고분 먹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다른 이들을 말려야 했던 게 아닐까. 땅에서 솟은 붉은 물에 목욕을 하겠다던 장도 역시 말려야 했다. 삿된 것들에게 호되게 당해 본 적이 없어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있는 걸까? 다들 어쩜 그리 속이 편할 수 있나. 무슨 일이 터질 줄 알고. 그것들은...... ......

  무량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떡을 집어먹은 게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로 화가 났다. 머릿속에는 팥이 둥둥 떠다녔다.

  그래.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나는 게 분명했다.

  팥.

  마경에서 갇혔을 적, 무량은 귀신들-그는 그곳에서 만난 이들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에게 팥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것이 저를 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동지였으니까. 그날은 혼례가 있는 날이면서 동지였고, 팥밥을 먹은 것은 저 하나였다. 귀신이 아닌, 살아 있는 자 하나.

  '우리 할아범이 만든 찹쌀떡인데, 요 팥이 정말 맛있지요. 드셔보시겠습니까?'

  노인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무량은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미쳤나, 이것들이. 또 농간을 부리는 건가?' 갓을 쓰고 서주에서 생활하던 나날, 그는 손님이자 이방인이었다. 귀신들은 늘 그를 환대하는 척하면서 내쳤다.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혼자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다. 밤중에 홀로 숲에 서 있는데 길은 모르고 속은 답답했다. 분명 누군가는 여기로 멀어진 것 같은데, 누구의 등도 보이지 않았다. 제 속을 모르는 원혼 하나만이 낄낄대며 옆을 스쳐지나갔다. 무량은 비도를 던졌다. 아무도 맞지 않는다.

  실은 지금도 심상세계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해독약을 만드는 법을 알려 주겠다던 노인도 독약을 만들지 모른다.

  어떻게, 무엇을, ... ...대체 누구를 믿으며 살란 말인가.

  한참만에 무량은 삼을 찾았다. 그 삼은 일전에 낙영과 함께 작약 뿌리를 캐던 자리에 있었다. 노인이 말한 대로 머리가 둥글고, 구름처럼 하얀 머리를 가진 삼이었다. 그땐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 그것을 수상해할 겨를도 없이 무량은 걸음을 서둘렀다. 빠르게 뛰어서인지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만 같았다. 가만 두면 무슨 일이 또 벌어질지 모른다. 여기서 누구를 잃을 순 없다. 팥...... 불현듯 팥이 떠오르자 무량은 다시 욕설을 뱉었다. 앞으로 팥이 든 것을 절대 먹지 못할 것이다.

  이윽고 다시 노인 앞에 섰을 때, 이번에 무량은 그의 주름과 거적대기를 본다. 그는 자신이 '이런 꼴'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무량은 마경에 갇혀 십 년의 세월을 먹었다. 노인의 주름이 가리키는 셀 수 없는 막막한 세월. 그것을 상상하자 욕지기가 올라왔다.

  "부탁드립니다."

  무량은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삼을 내밀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흰소리 좀 할 텐데, 조금만 용서해 주시죠. ... ...만약 당신도 저들을 괴롭힐 작정이라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다시 죽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대로 도와주십쇼."

 

 


허수아비

 

 

  안내인이 죽었다. 문을 열고 그의 시체를 바라보는 이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위는 조용했고,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안내인은 그의 집에서 죽었다. 그리고 말을 나누기도 전에 용의자의 소음이 그들의 귀를 당겼다. 창문을 부수고 사라지는 새까만 인영. 무량은 그를 쫓았다.

  앞서 뛰쳐나가는 이도 있고, 뒤따르는 이도 있고, 남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순간 무량은 그새 인영을 쫓는 이들마저 몇 갈래 길로 찢겼다는 것을 깨닫는다. 솜씨가 좋다. 누구를 쫓는지도 모르고 뛰고 있다. 심장 소리가 크고 손이 찼다. 비무장에 있던 무량은 안내인의 비명을 또렷하게 들었다. 공포와 경악, 혹은 분노가 담긴 목소리. 과거에 무량은 이렇게 남을 쫓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쫓긴 적도 있다. 그때도 밤이었다.

  없던 자가 있었나? 누구지? 아니, 도망자는? 이미 섞였나? 정말로 미쳐버려서… 그래서 안내인을 죽인 걸까? 심증만으로 범인을 잡는다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용의선상에 오를 것이고, 거기에는 무량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밑을 본다. 달밤의 그림자는 어둡다. 무량은 자신의 발밑에 피가 묻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

  바람소리.

  문득 고개를 들자, 밭에 있던 허수아비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무량은 그쪽으로 걷는다. 풀잎들이 옷에 스치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렸다. 허수아비에 입혀둔 옷이 반쯤 꺾인 몸체와 함께 달랑거렸다. 만약 이 길로 도망쳤다면, 허수아비를 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하지만 심상세계의 날씨는 엉망진창이고 허수아비는 언제든 저 혼자 옆으로 꺾여버릴 수 있다. 잔뜩 예민해진 귀에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망가진 허수아비로는 새를 쫓아내지 못할 터다.

  허수아비를 세워 본다, 꺾인다. 다시 세워 본다, 또 꺾인다. 다시… …

  이번에 무량은 허수아비의 몸을 신경질적으로 쳤다.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밭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시험이 언제 끝날지에 관해서, 사람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에 관해서, 믿음이 언제까지 꺾이지 않을지에 관해서… …

  무량은 꺾인 허수아비를 붙잡고 밭 위로 속을 게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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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 성장후 이벤트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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