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아나스 퓨리, 뉴먼, 안드레아
연회의 마지막 날 아침. 프랭키는 술에 패배한 사람들 사이에서 눈을 떴다. 저린 손을 펴자 냅킨이 굴러간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정량을 넘어도 한참 넘긴 했다. 프랭키는 원체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옷, 있고. 물건, 있고. 돈, 있고. 프랭키는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적거리다 동그랗게 말린 지폐를 눈앞으로 가져왔다. "돈도 써 본 사람이 쓸 줄 안다더니…." 지폐에 묶여 있던 서신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 번 펼쳤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서신은 구겨져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대신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하세요.' 그러나 그 주인을 닮은 필체만은 번짐 없이 바르게 적혀 있다. 서신과 함께 묶인 지폐 다발은 전날 아침 마찬가지로 취해서 뻗어 있던 프랭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프랭키는 서신과 지폐를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생애 가장 큰돈을 하루 만에 썼지만, 프랭키의 수중에는 아직 190파운드가 남아있었다. 뉴먼 메릿과 안드레아 르밀러가 준 돈이다. 프랭키는 돈을 어디에 쓸 지 궁리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주변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피해 물을 한 잔 들이켠 뒤 연회장을 나섰다.
친애하는 애니에게.
이왕이면 선물을 함께 마련하고 싶었는데, 나는 경매와는 영 맞지 않는가 봅니다.
그래도 애니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아주리라 믿고 작은 식사에 초대합니다.
끝내주는 와인을 준비할 테니 필요할 때 불러요.
래니.
친애하는 탐정님.
탐정님이 있는 곳으로 당장 찾아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 또 탐정님이 이렇게 말하겠죠.
오늘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모양이라고요.
편하실 때 찾아오시라고 서신을 남깁니다. 끝내주는 와인도 준비했으니까 꼭 오시죠.
들려드릴 이야기가 많습니다. 와인보다 이쪽이 더 구미가 당기시겠지만.
당신의 조수 남김.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연회가 끝난 뒤 프랭키는 레스토랑에서 비싼 코스요리를 시켜 먹고, 바에서 비싼 와인을 두 병 샀다. 이미 여러 번 이어진 프랭키의 기행에 질린데다 연회로 어지러워진 선내를 정돈하느라 피로가 쌓인 선원 하나가 프랭키를 보고 구시렁댔지만, 프랭키는 돈다발을 들고 웃어 보였을 뿐이다. '나한테 돈 있는데 어쩔래?' 못된 심보였다.
그는 고급 종이에 짧은 내용을 적은 뒤 안드레아와 뉴먼에게 남겼고, 어질러진 객실을 조금 치웠다. 물론 이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랭키는 객실 이곳저곳에 흩어진 종이들만을 모아서 정리했다. 대부분은 서신이나 쓸데없는 말을 휘갈긴 종이 쪼가리였지만, 개중에 찾는 것이 있었다. '친애하는 탐정님'에게 보여줄 단서였다. 뉴먼에게 제 약점을 들킨 것이 불과 며칠 전인지라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새로운 단서들이 뉴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리라. 뉴먼의 말대로 탐정이 제 약점을 잊어줄 리가 없었는데도 프랭키는 애써 낙관했다.
침대에 풀썩 드러누우면 무언가가 엉덩이를 찔렀다. 프랭키에겐 영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장식이다. 프랭키는 그것을 높이 들어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눈이 어두운 자는 아무리 봐도 보석의 정체를 식별할 수 없었다.
프랭키가 경매에서 얻은 건 독수리 모양의 황동색 장식으로, 눈에 박힌 검은 보석이 눈에 띄는 물건이었다. 이를 내놓은 자는 아나스 퓨리. "니케 호에 탑승하기 전부터 하고 있던 장식입니다. 뭐… 기성품이니 물건 자체로는 그리 가치가 없겠지만. 새의 눈에 박은 검은 보석은 진짜입니다. 까마귀에게 매력적일 것이라 생각되는군." 경매는 한창 물이 오른 시점이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떠들고 있는지 입찰하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높여야 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어디서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럽 쪽이면 오스트리아나 로마 제국이 있던 나라일 거 같군요?"
윈프레드는 물건의 고향을 추측했다.
"내 눈에 저 보석… 옵시디언이나 투어멀린 같은데 맞나요?"
"사실 흠집 잘 나는 굴러다니는 흑요석일지도."
"블랙 사파이어라면, 저건 엄청 가격이 뛸 거예요."
캉타뷔네와 프랑소와는 보석의 정체에 관해 추측했다.
"보석을 팔려면 누가 어디에 사용했는지 스토리가 있는 게 중요하니까 뭔가 이야기 좀 만들어 봐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 낙찰되면 그분께만 비밀스레 말씀드리겠습니다."
"새의 눈에 박혀있는 보석은 사실…. 주인에게 악운을 가져다주는 대신 그 악운을 견디면 세상 그 무엇보다 막대한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다거나요…."
마지막은 이오의 말이었다. '역시 이야기를 잘 짓는다니까.' 프랭키는 210파운드로 황동색 장식을 낙찰했다. 누군가는 광물의 가치도 모르는데 비싼 값을 매긴 게 아니냐 했고, 누군가는 전 재산보다 비싼 값을 들일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시했고, 누군가는 어차피, 그래봤자, 기성품이라고 했다. 프랭키도 이만한 돈을 한 번에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이유 하나, 프랭키에게 보석의 진짜 정체는 중요하지 않았다―궁금하긴 했다―.
이유 둘, 프랭키는 그냥 돈을 쓰고 싶었다.
이유 셋, 프랭키는 아나스 퓨리가 이 장식을 하고 있는 것을 몇 번 봤다.
"낙찰자. 다음에 봅시다."
인파 사이에서 분명하게 자신에게 와 꽂혔던 아나스 퓨리의 목소리.
프랭키는 장식의 전 주인을 찾아 니케 호를 배회했다. "퓨리 봤어?" 기이하게도 그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프랭키는 아나스 퓨리에 관해 되새김질한다. 경매장에서 그는 잘 닦인 석상처럼 앉아 경매가 돌아가는 것을 관망했다. 다른 날, 니케 호에서의 그의 모습도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아나스 퓨리가 무척 아름다운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인물을 눈여겨보지 않는 것이란 불가능하지 않은가.
마침내 해변을 바라보고 있는 아나스 퓨리를 찾았을 때 프랭키는 그 이유를 찾았다. 눈앞에 있을 때는 눈을 뗄 수 없지만, 지나친 다음에는 곧 잊게 되는 존재. 잘 닦인 뒤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지만, 그만큼 알 수 없는 존재. 감히 비유하자면 조각상 같은 인물.
아마 그래서 이 장식이 더 돋보였을 것이다. 프랭키는 새삼 우스워져 손안에서 독수리 모양의 장식을 굴렸다. 까마귀에게 매력적일 것이라 생각되는군. 아나스 퓨리의 말대로 그 장식은 까마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만 까마귀의 손안에서는 그것이 전처럼 빛나지 않을 뿐. 아나스 퓨리와 달리 프랭키의 품에서 그 장식은 남의 것을 훔쳐 온 것처럼 눈에 튈 터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유 넷, 이곳에서는 이야기가 가장 잘 팔리는 품목이군. 프랭키가 구매한 것은 아직 제 손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 이 잿빛 까마귀는 제 눈과 귀로도 빛나는 것을 담으려 했다.
프랭키는 아나스 퓨리의 옆으로 다가가 정적을 깬다. "낙찰자." 곁눈질로 프랭키를 본 아나스 퓨리가 그를 알아본다. 프랭키는 황동색 장식을 공중으로 던졌다가 잡는다.
"퓨리. 이야기는 준비됐어?"
#2021